무선망기로 오해하고 후회하는 무선이 6
무선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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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에서 망기의 삶이 쉽기만 했던 건 아니었을 듯. 남희신이 세밀하게 보살펴서 그다지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택무군이 안고 나타나 고소의 직계로 족보에 올렸으니 고깝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음. 어릴 땐 망기를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쨌거나 택무군도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라 망기를 잘 지켰고 때로 출처 모를 검은 연기가 망기에게 향하는 공격을 막아내기도 했음.
눈치 빠른 망기는 그 검은 연기를 눈치채긴 했지만, 남희신이 걸어둔 보호 결계려니함.
어릴때부터 영특하고, 또 천재였으니까 나이 들면서 점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적어지겠지. 언젠가부터는 너무 뛰어나서 시비걸만한 근거도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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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망기가 남희신에게 백부께서는 왜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냐며 투정처럼 불만을 말함.
이 생의 망기는, 남희신이 제법 응석을 받아주고 정을 많이 주고 키운 망기라 솔직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었음. 택무군은 숙부처럼 모질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위무선이 안고 나타났던 하얗고 작은 아기 망기는 정말 사랑스러웠으니까. 무선인 모르지만 망기 나이 아홉살 먹을 때까지도 택무군이 항상 품에 안고 다녔음. 이렇게 끼고 아꼈으니 보통은 망기를 남희신 아들로 생각하는데 어쨌거나 망기는 그냥 백부라고 부름.
아직 앳된 티가 나는 망기 빤히 쳐다보면서 그가 너에게 다정한데, 어째서 그렇게 말하냐고 물어봄. 아닌게 아니라 위무선 정말 망기에게 잘하니까.. 가끔 고소에 손님으로 오는데, 망기가 냉정하게 가끔은 예의없게 구는데도 그저 잘함. 남희신은 이유를 알지만 망기는 아니니까. 망기 성격은 그전과 비슷해서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착하고 차갑지만 기본 예의는 지킨단 말임. 그런데 유달리 무선이에게만 그러는 거. 불편하거나 무관심한 게 아니라 싫어함.
택무군과 고소의 좋은 이름을 이릉노조가 더럽히니까 싫다는거지.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알 순 없지만 돌아오던 길에 숙부의 영혼이 조금 섞였나 싶을 정도로 위영타도의 느낌이 다소 났을거임.
그렇지만, 위무선이 언감생심 망기의 곁에 오려하지도 않고 감히 욕심을 내지도 않으니 남희신이 나서서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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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무선이 망기를 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유로 이렇게 돌아오게 된 망기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음. 망기가 어쩐지 자길 꺼려한다는걸 알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기억에만 품어야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가끔 보러감.
아주 오래된 기억의 어느날처럼, 운심의 지붕에 앉아있는 위무선을 아직 앳된 얼굴의 망기가 노려보고 있었음. 눈을 마주치고 위무선이 웃었고, 망기는 한걸음 물러남. 지붕 아래로 내려와 밤새 고요히 눈이 내려 앉은 것처럼 아주 작은 흠집도 없는 하얀 뺨을 보고 있었겠지. 하얗게 달빛에 반사된 피부가 전부 거짓 같았음.
어려움 없이 자라 시선이 곧고 맑은 남망기..
위무선은 기어이 남망기를 제 품에서 두 번 죽게했고, 그러나 기어이 두 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음. 오늘의 망기는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걸 투정하고 싶을리가 없었지. 위무선을 사랑하지 않았던 망기는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차갑고 아득한 감각에 슬퍼하기전, 망기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그 감각에 안도할 수 밖에 없었음.
위무선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도 품안에서 망가졌던, 끝내는 생을 버렸던 망기에 대한 기억이 괴로웠음. 얼마전 누군가의 화살에 꿰뚫린 가슴팍에서 오는 고통인지 혹은 여전히 남아있는 마음이 주는 고통인지도 알 수 없게 어딘가 깊게 쓰라리기도 했지. 그때 아기 망기를 남희신에게 안겨주며 언젠간 자신이 망쳤던 함광군이, 그러니까 무선이가 놓지 못하는 그 순간의 기억이 흐려지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음.
오랫동안 슬퍼하라고 했던 망기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지금의 망기는 말 없이 피진을 꺼내들고 위무선의 가슴께에 겨누었음. 노조께서는 고소의 규칙을 존중하지 않으시는 거냐고,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가 물었고 위무선은 물러나지도 다가서지도 않았을거임.
그대로 몸을 기울여 가슴을 뚫어버린다면, 사랑하는 사람 손에 떠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말 할 수 없던 감정이 다시 망기의 눈을 마주하고 피를 머금은 식물처럼 난폭하게 가슴 안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 같았겠지. 다시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위무선은 그림자처럼 흩어져 사라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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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신의 고민은 단지 남망기가 위무선을 싫어하는 것보다는 위무선의 위치가 너무 안 좋다는 데 있었음. 과거엔 친구도 있었고, 워낙 압도적인 능력치가 있었던데다 선문세가를 굴복 시켜야할 적절한 원한과 이유까지 있었으니 망기가 죽었던 당시 위무선은 선독 그 이상의 지위였음. 냉천에서 망기가 발견 된 이후 몇년간은 더 잔혹하고 냉정했고, 이후엔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 속세와 상관하지 않았음. 이때에는 감히 이릉노조에게 대응하려는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그럴 명분도 없었던거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음. 위무선은 스스로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열성적으로 본인을 보호하진 않음. 목숨을 바깥에 내놓은 사람처럼 굴었고 본인보다는 고소에 해가 되는 이들을 별다른 설명없이 제거해버렸음. 이러니, 적절한 명분없는 횡포가 되는 거. 그때의 기산 온씨가 멸문 당했던 이유도 가문의 힘을 믿고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인데,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릉노조가 갑자기 은거에서 깨어나 선문을 곤란하게 한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음.
정확히 좋다고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위무선이 더이상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황이라, 아무리 공격 당하고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다는 점이 두려움으로 작용하고 있긴 했음. 어떤 선문 수사들은 분명히 제 검이 이릉 노조의 심장을 뚫었는데도 죽지 않았다고 두려워 했음.
근데 남희신이 위무선 걱정만 하고 있을 순 없었음. 위무선의 하나뿐인 지기로 이름이 난 택무군도 안전할 순 없었던거지. 거기다 택무군은 원래도 잔혹하게 이름이 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위무선보다도 쉬운 타겟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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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수 온축류도 적당한 때에 수명이 다해 죽었지만, 남희신은 그가 제자를 거뒀다는 걸 몰랐음. 당시 온씨는 멸문한 것과 같았고, 사유는 위무선의 분노였겠지. 온가들은 정말 처참하게 살해 당했고 다들 응보를 갚았다고 했지만, 그건 아니었을거임. 운몽 온씨로 편입된 온씨들은 원래의 온씨들과 왕래하거나 상관하지 않았으니 알아서 살아 남아야했음. 이미 오래된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언젠간 갚으라는 게 보통 이때 온씨들의 유언이었을거임.
화단수 제자들도 내단을 없애는 기술을 전수받긴 했는데 문제는 근접전이 아니면 거의 소용이 없다는 거임. 애초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니까 내단이 파괴된 수선자보다 접근하려다 죽은 온씨 수사들이 더 많았음. 그리고 이릉노조는 사술을 쓰는 사람이라 원거리 공격에 능하니 망기 생전이나 위무선 젊은 시절에는 내단을 파괴하기는 커녕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음.
기산 온씨는 멸문 당했고 남은 수사들은 유명 무실하고 그런 상황에, 온축류 마지막 제자의 제자쯤 되는 수사들이 위무선에게 복수하려고 했었음. 당연히 무선이가 넘사로 강하니까 반 정도는 죽었고, 무선이한테 상처를 내긴 했는데 죽지 않았음.
남은 수사들은 어차피 자기들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함. 그래서 생각한 복수 대상이 남희신일 듯. 택무군도 강하긴 하지만 한창 때는 지난 나이고, 고소에서 원로 노릇 하고 있으니 접근하기도 어렵진 않았음.
택무군은 이때 하필 망기랑 있었고, 망기는 온축류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들의 제자들도 모름. 당시 기산 온씨의 의복도 알아볼 수 없는거지.. 화단수 기술이 뭔지 몰라서 백부 지키겠다고 다가감. 그거 막아서다가 남희신 부상 당했고, 망기도 뛰어난 수사니까 나머지는 망기가 해결했겠지. 늘 안정적이고 차분하던 택무군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부상 당했다는 점에 고소의 모두가 놀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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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몰랐지만 남희신은 스스로 알았겠지. 과거의 망령이 저를 잡아먹은 거임. 묻어두었던 과거가 죽지 않고 그를 추적했음. 어떤 원한들은 사라지지 않는거니까. 아마 그 자신도 위무선에게 비슷한 감정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을거임. 버려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것들. 제 시기를 잃고 오래 머무른 감정들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삭아가는 것 같았겠지.
내단을 잃었다는 걸 알고 허탈하게 웃었지만, 부상이 너무 심해서 제정신을 보존할 수가 없는 거. 어차피 남희신 역시 이상할 정도로 오래 살아 진맥이 소용없는 수준인데 (실제로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까) 그나마 그게 다행일거임. 고소 장로가 내단을 잃었다 이런 소문이 나면 좋을 거 없으니까.
잠깐 정신을 차린 사이에, 며칠 밤을 샌건지 얼굴 색이 좋지 않은 망기가 저를 간호하는 걸 보고 이릉노조를.. 하고 중얼거리다 혼절함.
택무군은 단순한 이유로 위무선을 찾은거임.
혹시 이렇게 해서 이 길디 긴 생애가 끝난다면, 위무선에게 이번엔 남망기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하기 위해서.
아무도 모를거임. 위무선도.
근데 남희신은 기억함.
남희신이 기억하는 최초의 망기는 그때 망가지고 무선이 품에서 그를 저주하며 죽어갔던 남망기였음. 철저하게 망가져서 사랑하는 사람을 저주하며 죽어가는 것 밖에 못했던 그때의 남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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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희신도 이해할 수 없었음. 어느날 냉천에서 죽은채 발견된 망기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결한 것도 알고 있었겠지. 상흔은 피진에 의한 거였고, 피진 또한 영검이라 망기의 의지가 아니고서야 주인을 해칠 수 없었을 거임.
거기다 자기가 알기론 망기가 그때 죽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망기를 감금하고 죄인 취급하고, 남들이 함부로 망가뜨리게 뒀던 위무선은 없었고 망기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를 잃지 못하고 미쳐버린 위무선만 있었음. 분노라고 하기엔 조금 더 복잡했고, 망기가 결백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남희신 본인보다도 더 괴로워했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에 또 지독히 슬퍼하다하며 저와 같이 이 억겁의 시간을 이유없이 살아남았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남희신은 위무선을 용서할 순 없었음. 다만 죄업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낸다고 생각했겠지. 남희신이 원망을 내려놓은 때가, 위무선이 아기 망기를 찾아서 제 품에 안겨줬을 때였겠지.
인정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땐 이해할 수 밖에 없었음. 무선이가 망기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거. 남희신이 함부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이 깊어서, 망기의 인생을 망치지 않기 위해 물러나 줄 정도로 사랑이 깊다는 거.
남희신이 이해 못했던 건 위무선이 아니라 망기였는데, 이 생에서 망기는 이상할 정도로 위무선을 경계하고 싫어했고, 불신하며 가까이 오는 것조차 꺼렸음. 종종 마주친 위무선은 그런 망기의 태도에 상처를 받는 것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눈치였겠지. 이런 점 때문에 택무군은 위무선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나아가서는 갑자기 미래가 바뀌었던 점에 위무선의 의지가 있었다고도 생각했음.
하지만 진실이라는게 이 시점에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묻지 않았던 거지. 묻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위무선과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일이 남은 것도 아니었음. 사실 당부하지 않아도 아마 위무선은 망기를 지킬거였으니까 지금 남희신은 그다지 여한이 남지 않았음. 망기는 함광군으로서 죽었고, 지금 망기는 이전의 남희신이 해줄 수 없었던 모든 걸 다 해준 망기였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너무 오래 살아 지쳤겠지. 남희신은 반쯤은 죽은 몸을 안고 누워 한숨 쉬다가 문득 위무선을 조금 더 이해함. 남희신은 그렇게 아끼던 동생을 다시 찾았고, 여한도 없었지만 위무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훨씬 더 오래 이미 죽어있는 몸을 가지고, 사랑했던 사람을 영원히 잃은 채 살고 있는 거니까.
이렇게, 아주 오랜시간이 지나고서야 남희신은 위무선을 동정하기 시작함.
댓글
ㅠ 망기한테 택무군이 있어서 어느 생에나 다행임 ㅠㅠ
무선이 외롭겠지만 어쩌겠어 비참하게죽은 망기생각하면 ㅠㅠㅠㅠ
아ㅠㅠ택무군 죽으면 혼자 남은 망기 어떡해ㅠㅠㅠ 망기가 아직 무선이한테 마음도 안 열었는데ㅠㅠ
모두가 슬프다ㅜㅜ
뭐야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심장 갈기갈기 조용히 찢고가네…
붕생에서 읽은 것 중 가장 슬프고아릅답고웅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