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망기로 오해하고 후회하는 무선이 5
무선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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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기가 죽은 후 이릉 노조는 완전히 목표를 잃은 듯, 자신의 문파도 돌보지 않고 어둠속으로 사라졌음. 살아남은 온씨들은 위씨, 혹은 다른 성씨로 이름을 바꾸고 무상사존 이릉노조 휘하의 수사들로 살아남았겠지. 이렇게 이릉의 명맥이 유지되는 가운데 오히려 위무선의 행적은 희미해짐.
온정은 고소 수학시절 작은 인연이 있었던 강징과 기묘하게도 인연이 닿아, 서로의 불운에 대해 여죄를 묻지 않고 성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됨. 각자 가문의 멸문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있었기에 첫 아이는 강씨, 둘째 아이는 온씨를 이어 받았음. 물론 더이상 기산 온씨가 아니라 운몽 온씨로 바뀌었을거임.
아무도 모르지만, 위무선은 종종 찾아와 둘의 아이들을 돌봐주거나 한담을 늘어놓고 운몽의 좋은 술들을 모두 거덜낸 뒤에 또 한참동안 사라지곤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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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무군도 위무선의 행적을 알고는 있었음. 원해서 그런 건 아니고, 가끔 위무선이 냉천이나 한담동굴에 찾아와 멍하게 앉아있다 가는 걸 봤기 때문임. 망기가 무선이를 마음에 품고 있던 건 형장으로서 알았지만 위무선 역시 그랬다는 건 늦게 알았음. 남망기가 비명에 간 게 위무선 탓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원망이나 증오같았던 감정도 희미해졌음.
장서각에서 벌을 서던 위영이 저를 그렸노라며, 인상은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림을 소중하게 제 서책 사이에 끼워놓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음. 오랜 시간 후 남은 건 그리움 뿐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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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이는 단 한 번이라도, 잠시라도 망기를 더보고 싶어서 같은 사술을 계속 시도했지만 실패했음. 실패하는 순간 몸이 깨지는 듯한 통증이 반복됐지만 포기 할 수도 없었고.
그러다 스스로 흘린 핏물에 질식할 정도의 상황에서 깨어나서 알게 되겠지. 제 아무리 이릉노조라고 해도 죽었어야 할 출혈양이었음. 위무선은 이제 정말 죽지 않을거임. 죽지는 않음. 여전히 고통스럽고 상처입는 건 똑같지만, 죽지는 않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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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와중에 수련경지가 높은 위무선, 남희신은 늙지도 않고 기이할 정도로 오래 살아남았겠지. 남계인이 먼저 작고 한 후, 당년 부상이 심했던 강징도 수사치고는 단명했음. 온정은 신의로 이름 날리며 오래 살았지만 힘든 시간 견디며 같이 의지했던 정인을 잃고 오래지 않아 떠났음. 소중히 여기던 벗들도 과거를 기억하던 이들도 하나하나 사라지고 위무선과 남희신은 기이하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오랜 생을 살아감.
위무선은 거의 상고 신수처럼 여김 당하고, 남희신은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었음. 고소의 종주, 선독 자리를 거치고 장로로 물러나 후배, 자손들을 길러내다 이후엔 위무선처럼 행적이 묘연해짐. 혹은 장색산인의 스승 포산산인처럼, 그 또한 포산하여 이따금 운심으로 돌아와 어려운일들을 살필 뿐이었음.
위무선도 가끔 강씨 자손, 온씨 자손들이 어떻게 지내는 지 보러오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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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전해진 말이고, 남희신이나 위무선이 행방이 묘연했던게 아니라 직계들 외에는 두 사람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아서 좋을대로 세상을 돌아다녔을 뿐이었음.
둘이 가끔 차 한 잔 하러가면 이릉노조 전성기엔 사람을 씹어 먹었다더라~ 하는 괴소문 듣고, 운몽 출신이면서 생선도 못 발라먹는 위공자가 사람을요.. 하고 남희신이 낮게 웃고 위무선은 억울해하는 게 전부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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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이젠 이릉노조로도, 위무선으로도 할 일이 없었던 무선이가 장을 돌아다니면서 괜히 이것저것 찔러보고 간식거리 사서 한두개 집어먹고 배고파보이는 애들 나눠주고 하던 날이었음. 남는게 시간이라 여전히 수행은 높았고 늙지 않아 여전한 모습이었지만 세상에 아는 사람은 몇 남지 않아 인생 심심하던 그때의 일이었음.
난릉엔 거의 갈 일이 없었음. 금자헌은 오래도록 염리를 그리워했고, 그 마음이 진심이었던지 몇번의 만남이 고작이었던 그 인연 끝에도 기억은 또렷해서 그 종주는 여러 장의 초상화를 남김. 가끔 위무선은 금가의 수사로 분하여 염리의 초상화를 오래오래 바라보는 취미가 있었음. 금자헌 역시 온정이 떠난 이후 오래지 않아 영특한 방계 쪽의 아이를 입양 하여 기른 후 고요히 잠들었음. 아비는 그렇지 못했으나 금자헌은 무척이나 순정을 찾았던 탓에, 난릉 금씨의 좋은 가풍이 생겼겠지. 일부 일처하며 처지가 곤궁한 아이들을 거두어 뛰어나거나 혹은 수사가 되겠다는 의지만 있어도 외성 수사로 받아들였음.
그리고 이 날, 위무선은 작고 차분하고 하얀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앞에 앉아 오래오래 눈을 마주치고 있었음.
이 시기 위무선은 너무 오래 살았던 탓에 창백한 피부는 유리처럼 맑고, 눈의 흰자위는 오히려 푸른기를 띄며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단 말임. 동그랗고 순하게 생긴 이 아이는 위무선을 보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울지도 않았음. 물어보니 금가에서 거둔 고아인데 난릉에 온 이후 말 한마디 하지 않아 어떤 수업에도 아직 들지 않았다고 했지.
무선이는 잃어버린 친척이라고 둘러대며, 하얗고 말랑말랑한 아이의 손을 조물거렸고 아이는 놀랍게도 안아 올리는 무선이를 보고 작게 미소짓기까지 했음. 위무선의 좋은 옷과 귀물이 분명한 허리춤의 진정을 보고, 난릉의 하인은 잠시 고민했으나 난릉의 일은 분주하고 다망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게 고작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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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아이는 남망기였음.
위무선이 본 적 없는 나이대의 망기. 침착하고 까만 동공을 들여다보는 순간 알아차렸지. 그게 위무선이 이 오랜 시간 동안 놓지 못한 연정이건, 혹은 너무 오래 살아 숨쉬는 귀신이 되어버린 이릉노조의 능력이건 알아본 거였음.
그러나 위무선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음. 아이를 소중하게 안아, 더이상 어검할 필요도 없는 몸으로 날아 남희신을 찾아가 그를 안겨 주었음. 산속에 은거하며 침착한 시간을 보내던 그가 그렇게 동요하는 것도 오랫만에 보았겠지. 일말의 의심이 있었으나 오랫동안 침착하고 물처럼 고요했던 택무군이 아잠, 하고 아기를 안아드는 걸 보고 안심하고, 확신했음.
택무군이 그를 잘 돌볼거라는 것에 조금의 의심도 없었겠지. 꺄르륵 웃음 소리를 내며 남희신을 목을 끌어안는 아기를 보며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음. 더이상은 망기의 삶을 망쳐서는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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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하던 택무군은 고소의 장로로서 돌아왔고, 아이는 남희신을 백부, 남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음. 당연히 남잠이라는 이름을 받아 자라기 시작했고 열살도 되기 전에 이미 자를 얻어 희신은 그를 종종 망기라고 부르곤 했음.
이전처럼 고요하고 칼로 자른 듯 반듯한 성품이었지만, 남희신은 결국 남계인이 아니었던지라 돌아온 동생의 응석을 적잖이 받아주었고, 망기는 또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남가의 수사로 성장하게 되었음. 어릴 적부터 가장 뛰어난 수사 중 하나였지만 아껴주는 백부의 품에 종종 안기기도 했으며 고소의 직계로 인정받아 어려서부터 가문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서도 어엿한 장자 노릇을 해내기도 함.
열다섯이 되었을 때, 망기는 위무선이 가지고 있는 최초의 기억과 같은 얼굴이었음.
검은 옷을 입고 냉천을 멍하게 바라보던 위무선에게 외부인은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고 말함. 이때 남망기는 이릉노조 위무선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겠지. 백부의 이름을 더럽히는 이 사람을 무척 꺼리고 있었음.
아마 남망기와 위무선의 열다섯에도 그런 말로 첫 만남을 시작했을텐데. 다만 지금의 망기는 거부감이 분명한 표정으로 무선을 보고 있었음.
무선이가 가만히 쳐다보다 웃으니 대체 무슨 짓이냐며 덤벼드는데, 열다섯의 남망기가 지금 위무선에게 상대가 될리가 없었음.
망기는 고소의 좋은 검을 들고 있었지만, 이게 피진에 비교될 정도로 좋은 검은 아니었을거임. 혐오에 가까운 시선으로 저를 노려보는 망기의 눈을 보다 어색하게 웃으며 멀어졌음. 위무선은 이날 알았지만 저를 사랑하지 않는 남망기가 너무 어려웠겠지. 망기의 이런 시선은 제 손으로 망가뜨려 죽어간 남망기를 떠올리게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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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정인처럼 매일밤 곱게 가슴에 품고, 술에 취한 날 제 가슴에 수백번을 찔러 넣은 피진을 깨끗하게 닦아 택무군에게 주었음. 남희신은 무선이 아직도 피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지만 꺼리진 않았음.
망기는 하루가 지나지 않아 백부에게서 영검을 선물 받았고, 좋아하며 미소짓고 어린 아이처럼 희신의 허리에 매달려 안기기도 함.
위무선은 정인이 남긴 마지막 물건까지 그렇게 보내고 제 몸에 남은 흉터를 쓰다듬으며 잠드는 일에 익숙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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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의 가훈은 여전히 아정인지라, 선문세가의 권력구도가 이동하고 소란한 동안 운심 안에서 그저 안온하게 지내는 것이 고작이었겠지. 이런 가운데, 고소는 가끔 문파나 가문끼리의 다툼에 곤란을 겪기도 했음. 망기가 없었던 동안 이건 오롯이 남희신의 고민이었지만, 아기 망기를 운심에 데려다준 이후부터는 위무선의 일이기도 했음.
오랫동안 사라졌던 이릉노조는 홀연히 돌아와 난장강에 근거하며 때때로 몸을 드러냈음. 여러 수선자들이 그를 가짜라고 핍박하고 공격했지만, 죽어지지 않는 위무선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과거의 영광을 되돌린듯 했음. 운몽도 더이상 그의 고향이 아니었고, 이릉노조가 시작한 이릉 문파 역시 위무선의 오랜부재로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지 오래였음. 전설같은 존재인지라 몸을 드러내는 것 만으로도 위협이었을거임.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이후 습격 받는 일도 많았고 공격도 많이 받았지만 위무선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그런 공격들을 막으려 하지 않았음. 원한다면 하나의 가문을 멸문시키는 것 정도는 아무일도 아니면서 스스로의 상처에는 덤덤함. 이런 태도가 공포심을 더 불러 일으킨 것도 사실이었겠지. 난장강에 수천 수백의 흉시를 불러모아 산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내는 이 기이한 수선자는 일약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고, 동시에 이상한 점은, 이러한 성격의 마도를 수양했으니 가장 깨끗한 선도를 수양하는 택무군과는 적이어야 했으나 둘은 서로를 꺼리지 않음.
이처럼 위무선은 수수께끼같은 사람이었는데, 유일하게 운몽 온씨 중 온정 직계의 자손들과만 교류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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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몸을 드러내기만 해도 공격 당하기 시작한 위무선은 그게 남망기가 살았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의 반항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을거임.
온정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조카가 온유음이였음. 거기다 얼굴은 강징을 너무 닮아서 위무선은 유음이 제게 소리를 치고 욕할때마다 강징이 살아 돌아온 것같아 흠칫함. 온정이 죽기 전 유음을 그렇게 아꼈다는데 그럴만 함. 눈이 조금 더 동그랗고 턱선이 부드럽지만 강징을 무척 많이 닮았음.
위무선이 다치고 돌아오면 쌍욕을 퍼붓는데 그 기세가 한창 때 강징임.
상처가 한두개여야 치료를 하지, 더이상 목욕물이라고 볼 수 없고 차라리 좀 묽은 고약이라고 보는 게 나은 목욕통에 앉아있는 위무선을 보고 손가락질 하며 심하게 욕을 퍼부음. 위무선은 조카가 저러는 걸 은근히 즐기는 것도 본인의 빻취임을 인정하겠지. 세상에 자기 염려해주는 사람은 조카 하나 남았고, 그거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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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음은 생전 온정과 대화가 많았던지라, 위무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음. 이 생에서 남망기가 겪은 일이 그리 많진 않으나 그렇다고 적다고 할 순 없었겠지. 위무선이 유일하게 은애한 사람이고, 그걸 스스로 오랫동안 몰랐고, 그를 핍박했고 잃었고 그런 것들.
온정 생전에는 위무선이 종종 이릉에 망기 그림을 걸어 걸어두곤 했음. 그림 솜씨가 좋았으니, 복마동 동굴 안엔 종종 망기의 그림들이 생전처럼 고요히 웃고 있기도 했음. 무선이가 모른 건 온정이 혹시 모르니 그림들 중 몇점을 잘 보관해뒀고 후에 위로가 될 것 같거든 그에게 전해주라고 유음에게 전달했던 거.
그래서 유음도 남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음. 느닷없이 그가 이릉으로 돌아와 과거 이릉 노조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이유를 요즘 알았겠지. 택무군이 목숨처럼 아낀다는 그 조카 남잠을 보고 나서야.
댓글
망기가 환생했구나ㅠㅠㅠ 이렇게 다시 태어나려고 과거에서 죽은걸까ㅠㅠ 택무군에게 망기와 피진을 차례로 건네주는게 너무 슬프다ㅠㅠ
드뎌 튕기는 망기를 _ 근데 망기 또 와꾸에 홀랑 넘어가는거 아니냐 ㅋㅋ
아 정말 너무 감동이다
이거 수출해야해 빨리 이거 시발 드라마화해야한다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