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망기로 오해하고 후회하는 무선이 2

https://sngall.com/articles/70890
2023/02/01 10:33
조회수: 1488

찌통굴림주의

무선망기 

 

1

 


 #


애초에 온정은 한번도 망기를 그렇게 대하는 것에 동의한 적 없었으니까, 위무선에게 냉랭하기만 했음. 사실 그러는게 당연함. 온정이 차갑게 구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고 진맥하는 동안 죽은 사람처럼 차마 망기 쪽은 쳐다도 볼 수 없었음. 

그는 이제 수선자로 살 수 없어. 
고금도.. 연주할 수 없을거야. 누군가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쉈으니까. 
어깨가 망가져서 무거운 건 들 수 없을 거야. 
그는 울어서도 안 되고, 뛰어서도 안돼. 흉곽 전체의 손상이 너무 심해. 내상은 말할 필요도 없지. 
사실 그가 저렇게 걸을 수 있는 게 기적이야. 무릎과 발목이..
그리고.. 

기산 온씨의 의원이었으니 참혹한 상흔을 한두번 본 게 아니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정은 끔찍하다는 듯 몇번이나 눈을 감았고, 피를 토하듯 한숨을 내뱉고서야 말을 이어갈 수 있었겠지. 

몇몇 질낮은 수사들이 해선 안 될 짓을 했어.
근데.. 위종주께서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사람들 많은 곳에 데려가지마.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하니까. 
아무것도 묻지마.
그를 보호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마. 

온정도 온씨의 사람으로 적지 않게 곤란을 겪었고, 이릉노조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음. 타고나길 마음이 단단한 사람인데도 진맥 후 창백해져 정신을 못차렸음. 언제끝날지 모르는 고문을 가만히 앉아 기다린거나 다름없다고.. 시시각각 가슴이 뚝뚝 잘려 나가는 것 같지만 위무선은 차마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없는 거였음. 남망기가 죄없는 누군가를 그리 해할리가 없는데. 

쉽게 망기가 기다리는 처소로 들어가지 못했음. 치료라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말만 남겼지만, 그래도 수없이 많은 단약과 탕약에 쓸 말린 약초들, 그리고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의 잔소리를 남기고 간 온정을 생각하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음. 피투성이가 되어 그를 바라보던 남망기에게 물었어야했을까. 

어떻게 해야했을까. 뭐가 맞았을까. 어디서부터.. 언젠가부터 위무선의 모든 질문은 스스로를 향하기 시작함. 어디서부터 손댈 수 있었던건지, 혹시라도 이 모든 일을 바꿀 순 없을지. 가장 원하는 건 이 지독한 모든 일이 꿈이길 바라는 거였음. 지금 망기가 겪은 모든일을 제가 다 겪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텐데. 가장 빛나고 아정했던 함광군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


한때 고소에 몸 담았고, 이후 누구보다 함광군의 명예를 꺾는 것에 앞장 섰던 수사가 자결했음. 그는 몇번 이릉에 찾아와 함광군을 몰아붙이고 그의 뼈를 부수거나 허벅지, 어깨에 단도를 박아넣으며 겁박한 전적이 있었음. 

부끄러움을 알아 스스로 속죄하니 함광군께서는 부디 저를 잊어주길 바란다는 유서를 남겼을 뿐. 용서가 아니었지. 다만 잊어달라는 말을 남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모든 이들은, 마치 함광군, 남망기라는 존재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굴고있는 모든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어깨에 남은 자상은 온정의 단약으로 아물어 있었지만 망기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감싸쥐는 걸 보고 위무선은 죽은 사람을 다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함. 

이후 함광군에서 죄를 청하는 이들이 더 나타났지만, 몇몇은 스스로 자결하고 몇몇은 소리없이 사라졌음. 누구도 굳이 그들의 행방을 알고자 하지 않았음. 

죄를 청하지 않은 이들의 시체는 가끔 어디선가 발견되었고 수사들은 결벽적으로 그들을 입에 올리는 것을 거부함. 위무선은 종종 그 시체더미 위 자신의 머리를 올려놓는 걸 상상함. 


 #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음. 위무선 스스로도 많은 고초를 겪었고, 온조에게 잡혀갔을 때 고문을 겪었지만.. 이건.. 
온정이 마련해준 약욕을 마친 망기는 짙은 색 천으로 만들어진 의복을 보고 오히려 좋아했음. 등에 난 상처도 꼭 돌봐야 한다고 했다며 무선이 사정사정을 하고서야 상의를 끌어 내렸음. 

목 아래 멀쩡한 피부가 단 한 뼘도 없었음. 지져지고 멍들고 찢인 상처가 불길처럼 엉겨있었고 멍울이 지지 않은 자리엔 핏물이 고였겠지. 아물지 않은 상처들은 여전히 진물을 흘리고 군데군데 여전히 피가 비쳤음. 상처와 핏물로 더럽혀지지 않는 색상의 옷이 더 반가웠던 거.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조금씩 움직이는 피부 조차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로.. 흉시들의 살은 이미 썩어 이런 모양이었지만, 살아있는 망기의 온 몸도 그것과 같아서. 후들후들 떨리는 입술은 곧이라도 소리를 참지 못하고 오열하게 될 것 같았겠지. 무선은 조심스럽게 약통을 열어 손바닥의 체온으로 고약을 녹였음. 씁쓸하지만 약초의 좋은 향기가 나는 약은, 아마 온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 분명했음. 어깨부터 시작해서 조심스럽게 펴바르기 시작하자 어금니를 물고 참던 망기가 낮은 신음을 뱉었음. 

이 상처가 아픈 것보다, 더이상 망기가 그걸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내몰린 거겠지. 
숨을 쉴 수도 울 수도 없었음. 기계적으로 숨을 겨우겨우 들이마시고, 내뱉고 하며 조심스럽게 상처를 매만짐. 눈결처럼 희던 피부에 남아있는 색들이 너무 참혹하고 끔찍해서, 그간의 시간을 견딘 남망기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어서.. 위무선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 이 일은 상처가 다물리고 검붉은 흔적들이 피부 안으로 가라 앉을 때까지 매일 반복됨. 

어느날부터 무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의 상처를 돌봤겠지. 망기는 이따금 가느다란 목을 숙여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응, 하고 바람 소리 같은 대답을 내놓기도 했음. 온몸에서 약초향이 날 정도로 상처를 돌본 후, 때때로 구역질이 난다는 듯 그 자신의 몸을 바라보기도 함. 
한때 도자기처럼 고왔던 그의 몸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무선은 제 살가죽이라도 벗겨주고 싶었음.  


 #


난릉은 전 종주 금광선이 죽고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들었음. 염리를 잃은 금자헌은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천명했고, 사치스럽고 난잡하던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온유돈후를 새로운 가훈으로 삼기까지함. 

그리고 '기강이 바르지 않은' 몇 명의 수사들을 종주의 자격으로 처형함. 
이날 망기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고 위무선은 면목이 없다는 금자헌의 짧은 서신을 받게 됨. 

늦은 저녁 이릉에 소속된 몇명의 수사들도 간곳없이 무주고혼이 되었음. 누구도 묻지 않았을 거. 그들이 왜 남망기를 찾았는지 모두가 이미 알았으니까. 


#


운심에 가고 싶어.. 

오랫동안 공들여 망기를 돌보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처소 주변엔 겹겹이 방음 부적까지 둘러져 있었음. 감히 이릉노조의 본거지로 들어올 수 있는 이들도 없었고, 있다고 하다손 망기가 머무르는 곳 주변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지. 가끔 들려 진맥하는 온정과 위무선, 모든 걸 알게 되고 몇번이나 혼절한 후 찾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야 했던 강징 정도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 오랫동안 망기는 자리에 누워 하루의 전부를 잠으로 소진하곤했음. 

그리고 한참 만에, 위영.. 하고 조그맣게 부른 망기의 목소리로 이미 충분했음. 망기가 해달라는 게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었겠지. 들어줄 수 없는 거라고 해도 들어줬을거임. 늦은 저녁 살짝 무선의 옷자락을 쥔 망기가 시선을 내리깔고 유순하게 물었음. 운심에 가고 싶다고. 오래 걸을 수도 없는 망기를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같이 어검하는 게 최선이었음. 
가냘파진 몸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팔뚝과 허리를 조심스럽게 받쳐주고 운심으로 향했음. 

폐허가 된 운심을 보고 마음 아파 하리라 생각했지만 망기가 정말 눈물을 보였을 때 무선인 그대로 사람이 머리끝부터 갈라져 죽을 수도 있다고 느꼈을 정도였음. 온정이 망기는 울어서도 안된다고 했던 말 생각나서 뭐든 다 해줄테니까 제발 울지 말라고 빌었을 듯. 우리가 계속해서 희신 형님을 찾고 있었어. 용모나 품행이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형님께서는 반드시 안전하실거야. 고소도 다시 재건해줄게. 뭐든 다 지원할게. 하면서 여태까지 조용히 하고 있던 일들 다 풀어 놓겠지. 혹시 희망만 줄까봐 함구했는데 망기 우는 거 보고 정신이 나가버림. 함광군이 눈물이라니.. 남망기가, 남잠이 눈물이라니. 

한참 듣다가 진정한 망기가 덜덜 떨면서 정말이냐고 물어봄. 약속한다고, 희신 형님을 찾자마자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망기가 고개 저을 듯. 이런 꼴로 만날 순 없어.. 하다가 혼절함. 
온정 말 대로 망기는 더 울수도 없음. 단순히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극한까지 가버렸음. 


 # 


약속이 무색하지 않게 오래지 않아 남희신을 찾아냄. 남희신 또한 망기가 죽었다고 들었고, 고소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그대로 산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싶었겠지. 그래서 세상 소식에 귀 기울이지 않고 수도승처럼 지내고 있었던거. 

남희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하던 망기를 설득한것도 희신이었음. 무선이는 망기가 또 울까봐, 혹은 충격 받을까봐 막으려고 했지만 남희신이 그가 지내는 곳 창문 아래서 나는 도망쳤고 너는 그러지 않았다고, 부끄러운 사람이 있다면 형장인데 아우가 나를 봐주지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살겠냐며 설득했음. 이제 폐인이라 부끄러워 고소로 돌아갈 수 있으니, 형장께서 아우의 소원을 들어달라함. 

이릉과 청하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택무군은 고소의 종주로 다시 돌아가 명맥이 끊길뻔한 고소 남씨를 이어받았음. 형장이 모든 일을 다 하는 건 공평하지 못하니, 가규를 필사하여 몇권 전달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남김. 
위무선은 진심으로 남희신에게 탄복했음. 망기가 이 부탁을 정말로 기뻐했기 때문. 


 #


망기는 위무선이 곁에 없을 때 잠들지 못했음. 이 모든 상황을 겪게 한게 본인임에도, 위무선이 없는 순간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처럼 웅크려 숨는 것에 급급했음. 

무선이 방 안으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겹겹이 쳐놓은 결계를 몇번이나 보여주고 나서야 조금 안심한듯 했음. 늘 침착하고 고요하던 망기의 시선이 두려움에 떠는 걸 볼때마다 그대로 피가 빠져나가는 듯 손발이 차가워졌음. 가끔 망기는 고소의 소식을 들려주면 작게 미소짓곤함. 불온한 감정이 아무 때나 가슴 아래서 난동을 부리는 것 같았음. 


 # 


무리하고 있는 걸 알지만 유일하게 기뻐하는 일이라 말릴 수도 없었음. 손가락과 손목이 상해서 오랫동안 글을 쓸 수도,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손이 떨려서 결국 글씨가 모두 망가지기 때문에 스스로 붓을 내려놓으니까. 고소 가규를 아직도 다 기억하고 있구나. ..남잠은, 정말 변하지 않는 구나.. 예전에 개미 밟지 말라는 가규도 있었지? 하면 기억하는구나 하고 짧게 웃어보였음. 약 삼천개의 가규, 다시 지어지고 있는 고소..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아고 있는 것 같았음. 

상처는 다 나았네. 어디 아프진 않아? 

손목 위부터 시작되는 끔찍한 흉터는 새로 자란 피부가 비집고 나와 흉하게 얽혀 있었음. 아무렇지 않게 물은 무선은 다만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 위무선에게 남망기는 여전히 곱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흉해.

그리고 아무 순간에나 망기는 제 살갗을 보는 걸 끔찍해앴음. 

하나도 흉하지 않아. 처음봤을 때 누가 너 옥으로 빚어놓은 줄 알았어. 여전히 그래. 
..위문주님, 거짓말은 고소의 가규에 어긋나는 지라.. 
거짓말 아니야. 

예전이라면 망기가 웃는다는 거에 설레고 잠시 지어주는 미소에 마음이 떨렸겠지만 더이상 그러지 못하겠지. 모든 걸 이미 다 내려놓은 듯 울 때마다 안도하게 되는게 아니라, 불안해졌음. 망기는 꼭 저대로 증발하여 사라질수도 있을 거 같아서.

손이 가늘게 떨러 붓을 놓칠뻔 하고, 곱게 써놓은 가규 책본 위에 떨어뜨릴 뻔함. 위무선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손으로 막아주고, 아직 떨리고 있는 망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벼루 위에 올려두게 했음. 어차피 검은 옷이니 먹을 아무렇게나 닦아냄. 

마른 손가락에서 전달된 미미한 체온이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심장에 닿는 것 같아서, 아주 천천히 한숨을 뱉어내야했음.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천지가 뒤집히는 것처럼 설렘. 입가가 아주 조금 들려 웃은 것만으로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마음이 설렜고, 동시에 죄스럽고, 고통스러워 숨쉬는 것도 어려웠음. 죽어서도 말할 자격이 없어진 연심을 품고 그의 곁에 머무는 저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졌겠지. 


 #


고소의 대부분이 재건되고 회복 되었으니 꼭 한번 방문하라는 남희신의 서신에 망기는 한참이나 정신을 못 차렸음.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신을 쥔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겠지. 

요즘 위무선은 갑자기 이렇게 멎어버리는 남잠을 기다려주는 일에 익숙했음. 할 수 있는 말이 너무 적어서, 행여나 마음에 담아둬야만 하는 말이 새어나와 버릴까봐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기다리는게 당연해서. 그림처럼 고요해진 망기를 보다, 전부가 부서졌더라도 남망기는 강한 사람이었으니 돌아오지 않을까..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칠할, 아니 오할 정도는.. 예전의 그 남이공자로 돌아오지 않을까. 

고소로 돌아가 다신보지 않겠다고 해도 응당 받아들여야 했음. 
어느날 정신이 맑아진 그가 위무선을 거부하고 저주한다면 오히려 기쁠 것 같았음. 


 #


고소를 방문하는 남망기는 예전처럼 고소의 옷을 입었고, 말액도 두르고 있었음. 위무선은 단지 다정하게 웃었지만 울고 싶었겠지. 잠시 오래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남잠. 하고 불러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음. 


 #


남망기는 남희신 얼굴만 보고 잠시 걷고 싶다며 한실을 나왔음. 모든 곳이 예전과 똑같았지만, 망기는 정실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아했지. 단지 냉천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고,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무선이 거의 그를 안고 산을 올랐음. 

가만히 바위에 앉아 조금 드러낸 발목만 담은 남망기는 어느날 위무선이 알았던 고소의 남이공자 같았음. 차분하게 내리깐 눈, 새야한 피부까지. 곧게 뻗은 다리 위를 빼곡하게 채운 흉터가 아니었다면 무선은 어느정도 그 자신을 속일 수 있었을거임. 

무선이 쥐여준 한무더기의 호신부를 만지작거리던 망기가 탄식하듯 웃었음. 사람을 잠시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는 부적. 

위영, 네가 오래 전에 나에게 이걸 썼었어. 기억나?
어떻게 잊겠어. 내가 철이 없어서.. 
괜찮아. 그날은 전혀 기억이 안나. 
네가 술이 약했지. 

적어도 흉터로 훼손되진 않은 흰 손이 부적을 들고, 위영은 잠시 그 오래된 기억에 잠길 수 있었지. 

이 부적 효과가 좋았던 거 같은데. 너에게도 통해? 
..궁금해? 
응. 

가벼운 장난이라고 생각한 무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슴팍에 붉고 노란 부적이 붙음. 꼼짝 할 수 없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지니 조금 불안해졌겠지. 남망기가 저를 해치리라 하는 종류가 아니라 혹시나 미끄러져 다치기라도 할까봐. 허리까지 오는 냉천 안으로 들어간 망기가 오래전 그가 사랑했던 소년의 얼굴을 하고 웃어보임. 

피진이 어디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생을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만 유지되고 있다는 영력을 써서, 냉천 아래 잠겨 있던 피진을 들어올리는 걸 멍하게 보고 있었음. 위무선은 간절히 바랬음. 그 검이 제 목을 찌르기를. 


 #


고소수학시절 했던 모든 말을 더해도, 아마 무선이 그에게 반나절동안 걸었던 말보다도 적었을 거. 과거를 생각하면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망기의 지금 모습은 상상조차 불가능했으니까. 꼼짝할 수 없는 위무선의 곁에 걸터앉아 망기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을 걸었음. 

영원히 나아지지 않을거야. 이 상처. 흉터.. 예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거야. 위영,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몸은 더러워. 

소매를 걷어 그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던 흉터를 눈 앞에 보였음. 망기는 살을 베어내고 싶다는 듯 제 팔뚝을 천천히 쓰다듬고, 흰 천이 젖어들어가며 드러난 상처를 가볍게 긁어내림. 

그들이.. 그들이 나에게 한 짓.. 개처럼 끌려다니며 모욕을 겪은 거.. 

..그래도.. 견딜만했어.. 다만 네가 나를 믿지 않았던게 괴로워. 단 한순간도 괜찮아지지 않았어. 괴로워. 지금도 괴로워.. 살이 썩는 것보다. 네 옆에서 내내 고통스러웠어.. 위영.. 네가 나를 버렸어. 네가 나를.. 

네 옆에서..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어..

네가 미안해하는 거 알고 있었어. 나에게 죄스러워하는 거. 네 앞에서 죽어버리려고 기다렸어, 위영. 네가 나를 염려할 때, 내가 네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을 때 죽어버리려고 기다렸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 죽을 수도 있었을 거임. 그때 망기가 기다렸던건 사실 이런 마지막은 아니었지만. 믿어주지 않을까, 혹은 언젠가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까. 잠시의 고통은 견딜 수 있었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모욕 당하면서도 그래도 지독한 감정은 죽지 않고 남아서 언젠가 위무선이 저를 봐줄거라는 희망을 계속해서 망기에게 주었음. 천천히 금이가고 물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무력해진 남망기가 자신을 전부 잃었다고 생각한 후에야 위무선은 눈물 흘리며 저에게 돌아와주었음. 
수백번의 밤을 그렇게 보내 놓고. 그의 눈물은 아무 가치가 없던 긴 시간을 지나, 강징의 말 한마디에 그를 돌아봤다는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겠지. 망가진 몸을 숨길 수도 없었고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도 없었음. 운심에와 눈물을 보인 것도 다분히 계획적이었음. 제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위무선이 고소를 위해 그렇게까지 힘쓸 수 없을테니까. 남망기는 남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길 바랬지만 고소는 아니었지. 택무군이 살아돌아와 다시 고소 남씨의 명패를 올렸을 때가 단 한 번 남망기가 과거처럼 살아있음을 느낀 순간이었고. 

하지만 이렇게 살게 해놓고, 사랑에 미친 남망기를 폐허로 만들어놓고 위무선은 그를 조금도 돌아보질 않았음. 끝까지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끝내기로 한거지. 생은 그저 길었고 고통스러웠을 뿐이라.

..위영..
오래전부터 사랑했어. 네가 장서각에서 나를 그렸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네가 그 부적을 나에게 붙였을 때였나. 아니면.. 네가 비파를 던졌을 때.. 혹은 너를 처음 봤을 때.. 아주 오래던부터 은애했어 위영.. 

이제 제 것이 아니길 바라는 감정을 그렇게 던져 놔야 했음. 지금 이 순간에도, 혹시나, 한번은 솔직하게 말했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덧없는 희망을 가지는 저를 원망하면서. 
그렇게 미웠지만 끝내 그렇게까지 사랑했으니 약해질대로 약해진 남망기가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겠지. 온몸이 찢어진 저를 보고도 차갑게 돌아서던 수 많은 밤, 한번은 물을 수도 있었던 여러가지 의문을 모두 덮어버린채 저를 원망하기로 한 위무선, 그래놓고, 고작 돌아온 강징의 말 한마디에 모든 걸 버릴 것처럼 제 앞에서 먼저 무너져 버렸던 것까지. 

망기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져 스스로의 눈물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음. 하악, 하고 종이가 구겨지는 것처럼 허리를 굽혀 얕은 숨을 뱉어내다 쿨럭거리며 검은 피를 토해낼 정도로. 스스로 만들어낸 부적에 묶여 지켜봐야만 하는 위무선은 차라리 제 심장이 찢어지고 가슴이 뜯어지길 바랬겠지.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눈앞이 흐릴 정도로 눈물이 흐르는 건 느낄 수 있었음. 

제 피로 적었던 주술이니 위무선이 아예 풀어낼 수 없는 건 아니었음. 힘줄이 뜯기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손가락 하나하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위무선을 바라보던 망기가 조그맣게 웃어보였음. 네 수행이 결코 얕지 않다는 건 내가 알지..하고 작게 중얼거림. 오래전 고소에서 투닥거리던 시절에도 그렇게나 뛰어났었으니까. 망기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기억이었음. 

위무선이 끝내 가슴팍에 붙어있던 부적을 뜯어내던 순간이었음. 생을 붙들고 있는게 고작인 수준으로 영력이 고갈되어 더이상 수선자로는 살 수 없을 거라던 온정의 말이 무색하게, 오래전 함광군의 명성처럼 깨끗하고 명료한 손길이 피진을 들어올릴 때, 과연 예전과 같은 남망기였음. 무선이 한걸음을 채 내딛기도 전에 새야한 피진의 검신이 망기의 가슴을 꿰뚫었음. 날씨가 좋아 고소의 명산은 그림과 같았고, 여전히 구름속을 걷는 듯 모호한 산중에 맑고 새빨간 혈흔이 길게 이어짐. 누군가 공들여 그린 마지막 그림처럼. 

슬퍼, 위영? 

검을 뽑아내면 그대로 심장이 멈출 것 같았고, 뽑아내지 않으면 강물처럼 이어지는 혈흔이 결국 남망기의 마지막 숨까지 거두어 갈텐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손으로 망기를 받쳐안으니 옷가지가 전부 젖어들어가기 시작하겠지. 바랄 수 있는 게 있다면, 이 전부가 꿈이길 바라는 거. 전부 꿈이라서, 깨어나면 아정하고 고요한 망기가 제 손을 잡아주지 않을까. 혹은 모두 어렸던 시절로 돌아가 철없이 냉천에 빠지고 검을 마주댈 수 있지 않을까.. 
사고를 거부한 머릿속이 멍하게 굳어가기 시작함. 

네가.. 아주 오랫동안 슬펐으면 좋겠어. 

숨이 끊어져가는 남망기의 마지막 목소리는 가늘고 연약했지만, 위무선의 뼛속까지 이미 뿌리를 내렸음. 
용서를 빌 수가 없었음. 
언젠가부터, 용서를 빌 수 가 없었음. 용서를 빌고 나면 두껍게 자란 마음의 벽이 끝내 사랑을 말하게 될까봐, 양심도 없이. 이렇게 상처내고 망가뜨린 사람을 감히 심장에 품었노라고. 사랑하고 있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매초 매순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게 될까봐. 품안에서 천언히 식어가는 남망기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차마 뱉지 못해 담아둔 말은 그렇게나 많았지


 #


한참 후에 고개를 들었을 때 남희신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위무선을 바라보고 있었음.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 서있었는지 하얀 장포가 붉게 물들어 옷을 다 적시고 있었음. 

남망기의 마지막이었음. 

그가 끝까지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들은 결국 이 곳에 있었으니, 아주 오래 후에, 희신은 농담 같은 목소리로 망기의 마지막이 그리 나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자조했음. 

위무선은 후에 모든 걸 알게 된 남희신에게 그를 죽여달라 청했지만, 그가 거절했음. 
위무선은 고소의 은인이며, 
이릉의 종주이고,
또한,
남망기를 따라 죽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code: [b519e]
목록 Gift

댓글

code: [45c25] - 2023/02/01 13:09

난 남망기가 저러고도 사랑해서 용서하니 했으면 홧병 났을거 같은데 합당한 무서운 복수였음 ㅠㅠ 망기 사랑이 깊었던 만큼 애증이 지옥불 같았을 듯 ㅠㅠ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45c25] - 2023/02/01 13:11

무선이가 이해안됨 .... 연심품은 상대를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게 연심이란 말이 우스움 ...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d23bc] - 2023/02/02 11:18

망기는 말을 했어야 했고, 무선이는 물어봤어야 했다ㅠㅠ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망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를 했네ㅠㅠ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725cf] - 2023/02/02 21:37

망기의 연심은 깊고 넓음 상상할 수 없음 ㅠ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1b9c0] - 2023/02/05 21:11

망기가 조금 평범한 사람이였다면 편했을텐데 그놈들과 무선이 모두 죽이고 본인은 살았어야됐다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eaf2f] - 2023/02/11 23:56

내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슬플꺼야….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c722b] - 2023/03/08 13:28

미친...미친...센세 뭐야...?? 뭐야이대작....아나존나미친놈처럼 밥쳐먹다말고 오열중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code: [deb1e] - 2023/11/29 14:14

네가 아주 오랫동안 슬펐으면 좋겠어, 이 말이 너무 슬퍼ㅠㅠ 자기가 사랑해서 어떤 고통이든 감내했던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고 떠나는 망기의 심정이 어떨지...남망기를 따라 죽을 자격이 없다며 무선일 죽이지 않는 남희신도 슬프고, 자신의 과오 때문이지만 저걸 평생 안고 가야 할 무선이도 슬프다. 천천히 곱씹으며 다시 읽고 있는데 정말 대작이야

답글
permalink 삭제 gift

목록
No 제목 날짜 조회수 추천수
Notice 중어권 연예 갤러리 01-27 76967 225
101213 💙망기모닝💙 [2] 06:58 28 3
101212 💚❤왕샤오모닝🦁🐰💘. [4] 06:14 31 5
101211 샤오잔 위시 백옥 썬크림 비하인드 05:17 45 4
101210 장링허 춘절 우시역 푸티지 소개 05:07 30 2
101209 메타윈 민트 잡지 비하인드 02:05 29 1
101208 맹자의 4월말 황금벌 화보🍯🐝 01:07 30 2
101207 전에 입덕해서 교단 월초글에 처음으로 댓 달아봤는데 [1] 00:56 30 3
101206 🩵💛🩷 5월에도 이대곤 멋짐 건강응원 🩵💛🩷 [2] 00:28 23 2
101205 💚💚💚💚💚5월에도 이보랑 일박비들이!!!!!💚💚💚💚💚 [7]
00:02 60 7
101204 이보 바이췌링 새 사진 미모 봐😇 [1] 04-30 68 4
101203 장링허 CeraVe 전화 04-30 35 2
101202 오늘 슈에무라 이보 너무 예뻐😇 [2] 04-30 72 4
101201 송위룡 화보 촬영 비하인드🥐 [1] 04-30 69 4
101200 오늘 이보 보피셜에 올라왔다😇 [2] 04-30 76 5
101199 이보 웨이보💚 라코스테 새 영상💚 [1] 04-30 73 6
101198 장링허 Carslan 3D 전광판 광고 예고 04-30 35 2
101197 덩웨이 선태유수 모아 방영 인사 04-30 36 2
101196 장링허 Rellet 봄 스프레이 축제 예고 04-30 36 2
101195 류위닝 개시추리파3 발표회 단둥 춤왕 04-30 34 2
101194 류위닝 개시추리파3 튀톈 식품 공장의 비밀 스틸컷 04-30 3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