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링허적소문 류위닝 <영원한 가을> 3
이리 하여 마침내 오늘 아침, 나는 에리키아로 향하는 직행 열차를 타기 위해 왕실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마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덧 완연한 초가을에 이르러 나무들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물들고, 하늘은 가슴이 아릿할 정도로 푸르고 맑았다. 얼굴로 가을 아침의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마치 샤오원을 처음 만나던 그 아침 같았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희색이 만면한 채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일렬로 도열해 있는 시종들 중 시종장의 손자가 흡사 하룻밤 새 십 년은 늙은 얼굴로 울적하게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옆에 있는 처음 보는 얼굴의 어린 시종에게 눈짓하였다. 그러자 그가 내 말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나는 속삭였다.
“저기 저... 저 친구 이름이 뭐였지?”
어린 시종은 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고는 말했다.
“주아헌입니다.”
“아, 주아헌이 오늘 왜 저렇지?”
그러자 어린 시종은 허옇게 질린 채 한참 내 얼굴을 보더니 더듬더듬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나는 다소 당황하여 말했다.
“아니, 하룻밤 사이 몰골이 말이 아니지 않아. 설마 내가 지금 에리키아에 간다고 그러는 것인가?”
사실 시종장은 어릴 적부터 나의 다채로운 기행을 모두 보았기에 내가 이번에 에리키아로 떠나는 것을 몹시 탐탁치 않아 했다. 뭐, 그렇다고 시종장의 뜻을 들어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래 함께하다 보니 정이 들어서인지 웬만하면 기분을 달래주고 싶었다. 하여 그의 손자인 시종이 이렇게 사색이 된 채로 나를 배웅하자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때 어린 시종이 답했다.
“저... 그... 어.. 그... 어... 그...”
도대체... 이 질문이 그리 어렵단 말인가? 새로 온 아이라 그런가? 내가 의아해서 그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때 그가 눈을 질끈 감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약혼녀한테 버림받았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가 얼른 다시 다물었다. 주아헌한테 약혼녀가 있었단 말인가? 이제 고작 열여섯인데? 아무튼 오죽 마음 고생이 심했으면 저렇게 갑자기 늙었을까. 나는 소중한 이를 잃는 아픔을 잘 알고 있었기에 문득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군.”
나는 주아헌에게 무언의 격려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왜 제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다른 사람보다 세 배의 중력을 받은 것 같은 몰골로 조용히 나를 따를 뿐이었다. 상실감이 정말 큰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쓰인 것도 잠시, 나는 에리키아로 향할 생각에 가슴이 너무 설레었으므로 다른 생각은 모두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고 말았다.
나는 플랫폼의 계단을 올랐다.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계단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보니 플랫폼 위로 나를 호위할 군인들이 검은 군복을 입은 채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내가 플랫폼에 올라서자 그들은 모두 함께 경례하였다.
나는 즉시 시선을 돌려 나를 수행할 중령을 찾았는데, 놀랍게도 내 시야에 들어온 중령은 엄청난 장신으로 무려 나보다도 더 키가 컸다. 그는 내가 다가서자 밝게 미소를 짓더니 깊고 힘있는 음성으로 보고했다.
“오늘 전하를 모실 중령 류위닝입니다.”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남자한테는 키 외에도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령치고는 나이가 기이할 정도로 젊다는 것이었다. 고작 삼십 정도나 되었을까? 또한 첫인상은 아주 날카로워 보였는데 말을 시작하자 즉시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고작 한 마디 나누었을 뿐이지만 어쩐지 시원하고 포용적인 성품 같아 보이는 것이 이 사람은 나를 귀찮게 하거나 감시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숙부께서 웬일로 이렇게 괜찮은 사람을 붙여주셨을까? 잘 되려니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유년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열여섯을 넘기고부터는 모든 일이 잘 될 운명인 듯싶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나쳐 기차에 올랐다.
내가 궁정 시종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렸기에 시종들은 플랫폼에 남아 나를 배웅해야 했다. 객차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창문에 고개를 기댄 채 이제 방학까지는 보지 못할 왕실 기차역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몇 분이나 지났다고 가을 햇살은 어느새 더 뜨거워져 있었다.
그때 기차의 경적이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창 밖의 시종들을 향해 작별의 의미로 손을 들어올렸다. 시종들은 손을 모으고 선 채 나에게 공손히 목례를 했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선 그들의 얼굴은 흐릿하게만 보였지만, 어쩐지 그들의 눈에서 애정과 함께 애달픈 작별의 정서가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시큰거렸다. 내가 우겨서 한사코 모두의 뜻을 꺾고 에리키아로 향하는 것인데, 어째서 떠나는 순간에는 이토록 아쉬움이 남는 것일까? 나는 목을 빼고 다급히 궁정 기차역의 마지막 모습을 이리저리 눈에 담았다. 이윽고 기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플랫폼이 점차 뒤로 멀어지며 친숙한 이들의 모습이 작아지더니, 이내 모두 창틀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아쉬울지라도 몇 달 후면 방학을 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에리키아를 떠나기 싫다고 눈물을 흘릴지 모르지. 결국, 나란 사람은 한 평생을 그리움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가?
그리 마음을 먹자 아쉬움은 서서히 사라지고 긍정적인 기대감이 가슴을 채웠다. 앞날만 생각하자. 기차가 출발한 순간 벌써 나의 에리키아 생활은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시간을 애상으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눈을 감고 찬찬히 떠올렸다. 에리키아의 넥타 강과 에리키아 성... 에리키아 대학. 그곳에서 나와 함께 할 소중한 이.
그러자 잔잔한 기쁨은 곧 심장을 울리는 환희로 바뀌었다. 나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눈을 떴다. 그래, 드디어 내가 간다! 에리키아로... 내 청춘의 가장 따스한 기억이 될 그곳으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기차에 속력이 붙자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어 외투를 벗어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아무리 내가 시중 받는 것을 질색한다지만 아직 아무도 시중을 들러 오지 않은 것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군사 학교 시절에도 시중 없이 웬만한 일들은 스스로 다 해냈던 나였기에 사실 이 편이 더 편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객실 문이 열리더니 아까 보았던 류위닝 중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류위닝은 그들을 밖에 남게 하고는 문을 닫고 객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 멈추어 서서 부드러운 얼굴로 예를 올렸다.
“왕세자 전하,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없소. 고맙소.”
중령은 편안한 미소를 띤 채 목례를 했다. 그리고 그가 발소리를 죽여 물러나려는데, 그 순간 문득 그의 따뜻한 눈빛과 음성이 어쩐지 친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시감인가? 왠지 그에게 말을 시키고 싶어졌다. 나는 얼른 그를 불렀다.
“중령.”
“예, 전하.”
류위닝은 나의 부름을 반기듯 다시 정중하게 내 앞으로 걸어와 섰다. 나는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중령은 올해 몇 살이오? 아주 젊어 보이는데.”
“아, 올해 서른하나입니다, 전하.”
그는 흔쾌하고 소탈하게 대답했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서른하나에 벌써 중령이 될 수 있소? 작위가 어떻게 되시오?”
그는 아, 하더니 쾌활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저는 바스 공국의 백작인데, 바스 공국에서는 귀족 출신 사관이 적어 쉽게 승진할 수 있었고, 이미 조국에서 중령이 된 채로 칼리스텐 군에 입대했기에 높은 계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
바스 공국은 나의 왕국이 속한 오버케언 연맹제국과 그 숙적인 모리 제국 사이에서 그야말로 새우 등이 터지고 있는 소국이었다. 두 제국이 바스 공국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은 모두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이는 바스 공국이 지난 몇 년간 대국들 사이에서 자국을 지키기 위해 판세에 따라 이리저리 편을 바꾼 전적이 상당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바스인들은 상황에 따라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배신자들로 낙인이 찍혀, 심지어는 옛 말에 물줄기가 급격하게 꺾이는 강을 ‘바스 같다’라고 부르는 표현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런 만큼 바스인들이 양 제국에서 받는 차별은 혹독했고, 전통과 신의를 중시하는 나의 칼리스텐도 그 부분에 있어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남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내 물음이 혹여 그를 불편하게 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였구려. 왕세자의 호위는 중령부터 맡을 수 있어 언제나 나보다 훨씬 연배가 있는 중령들의 시중을 받아왔는데, 처음으로 젊은 연배의 중령을 보니 반가워 물었소.”
그러나 그는 단 한 순간도 내가 자신을 천시하거나 차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지 신뢰와 친근함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또한 오늘 이처럼 왕세자 전하를 모시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에게는 무척 남자다우면서도 한없이 포용적이고 따뜻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어쩐지 무한한 호의가 느껴졌다. 살면서 이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진심 어린 호의로 대하는 사람은 형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미소 짓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앞자리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아,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중령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나와 마주보는 좌석에 앉았다. 괜히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나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참 마음에 들었다. 왠지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궁정에는 시종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왕족도 있다는데 칼리스텐 왕실은 어찌 된 게 예법이 너무 엄격해서 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나는 무슨 얘기를 꺼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참, 오늘 바스 공국의 명절 아니오? 오늘 축하하는 가을 명절이 있다고 들었는데?”
류위닝은 좋은 의미로 놀란 듯 말했다.
“맞습니다. 오늘은 바스 공국의 가을 축일이지요. 전하께서는 역시 사려깊으시군요. 바스의 명절을 다 기억해주시다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감동 어린 기색이 떠올랐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저 조금 마음을 쓴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감동할 줄은 몰랐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본국에도 바스인들이 많으니 응당 알아야 하지 않겠소. 오히려 왕세자인데 더 잘 알지 못하여 부끄럽구려.”
나는 쑥스러워서 얼른 말을 이었다.
“참, 혹시 수행하는 군인들 중에 또 바스인이 있소?”
류위닝은 무심코 객실 문 밖에 다른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을 곳을 돌아보더니 잠시 말을 고르다 말했다.
“아, 예, 있습니다. 아까 전하께 인사 올렸던 군인들 중에 눈동자 색이 옅은 사내가 있었지요? 저와 마찬가지로 바스 출신입니다. 이름은 지엔틴이고요. 에리키아에서 제가 업무로 부재한 동안은 지엔틴이 전하를 수행할 겁니다.”
나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명절에 고생들이 많구려. 나를 수행하는 지루한 업무를 다 맡고.”
류위닝은 별안간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은 평소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친근해 보였다. 그리고 따뜻했다. 그는 한없이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명절에 전하와 함께 에리키아로 떠나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드는 걸요. 저에게 에리키아는 제2의 고향과 같답니다.”
나는 눈을 빛내며 그에게 물었다.
“에리키아를 잘 아시오?”
“예. 전에 에리키아에서 대학을 다녔었지요. 하지만 입대를 위해 2년 만에 휴학했습니다.”
나는 반가움에 앉은 채로 펄쩍 뛸 뻔했다. 그러나 얼른 체면을 생각하여 자세를 고쳐 앉고는 물었다.
“언제 다녔소?!”
“제가 조금 늦게 대학을 갔습니다. 스물두 살에 진학했었지요.”
“그러면 혹시 복학을 할 예정이오?”
에리키아 대학은 사교의 목적으로 수학하는 귀족들이 많은 학교로 10대부터 50대까지 재학생들의 연령이 다양했다. 류위닝은 호쾌히 웃으며 답했다.
“예, 이번에 저도 복학하여 전하와 함께 수학하며 수행할 예정입니다.”
세상에! 이 사람이 나와 같이 대학을 다닐 선배라니!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무척 의지가 되었다. 그가 벌써 내 가까운 형처럼 느껴졌다. 나는 두 눈에 동경과 선망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왕숙께서 중령을 나의 수행원으로 붙여 주신 모양이구려! 에리키아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대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것 같소.”
그러자 류위닝이 다정하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 제가 부족하나마 전하를 데리고 에리키아의 재밌는 곳을 좀 다녀보겠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어쩐지 기대해도 좋다는 듯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
세상에... 이 말을 왕숙께서 들으셨으면 뭐라고 생각하셨을까? 이렇게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이렇게나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이 사람은 실제로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꿈일까? 나는 너무 크게 웃어서 얼굴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열렬히 답했다.
“좋소! 중령만 믿겠소! 아아, 어찌 중령처럼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왔는지. 앞으로 에리키아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울 것 같소.”
그 말을 듣자 류위닝의 눈에 기쁨이 반짝였다. 그는 나한테 에리키아의 참맛을 전수해줘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을 띤 것처럼 의욕 있게 말했다.
“분명 재미있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도착하시면 어떤 걸 제일 먼저 하고 싶으십니까?”
나는 웃으며 입을 떼려다가 문득 내가 에리키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어서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샤오원과 함께 대학을 다니고... 강가에도 놀러 가고...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에리키아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고... 평생 엄격하게 생활하느라 거의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어서...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소.”
류위닝은 지극히 따스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사촌 형이 나를 바라보던 눈길을 무척 닮아 있었다. 한없는 애정과 호의, 심지어는 애틋함. 문득 심장이 쿵 울리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때 그가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내리깐 채 고민에 잠기더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처음부터 너무 신나게 놀기는 힘드니 우선은 전하께서 평소에 관심을 가지셨던 분야부터 하나하나 보는 겁니다. 에리키아에는 멋진 중세 성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그건 알고 있소.”
나는 모처럼 아는 게 나오자 신나서 답했다. 류위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면 그곳 테라스에 멋진 식당이 있는 것도 아십니까?”
“그건 몰랐소만?”
나는 솔깃해하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류위닝이 뿌듯하게 웃고는 말했다.
“그곳 테라스에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내려다보면 넥타 강 주변 에리키아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지요. 이맘 때쯤이면 성과 마주보는 산에 황금빛 단풍이 물들었겠네요.”
류위닝의 두 눈과 음성이 그윽해졌다.
“늦오후 무렵이면... 서쪽으로 기울어진 노을이 비스듬히 넥타 강물을 비추며 황금빛으로 반짝이는데, 그 너머의 산에 그 빛이 닿는 광경이 그야말로 절경이랍니다. 분홍빛 벽돌의 아치형 다리와 어우러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지요. 바로 그 옆의 은빛 교회 탑은 또 어떻고요. 그 교회 주위에는 이상하게 아침마다 안개가 끼는데, 늦오후가 되면 안개가 사라지면서 탑에 내려앉았던 물기에 햇빛이 반사되어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낸답니다. 마치 따스한 빛의 세상과도 같죠.”
나는 그의 묘사에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분명 가본 적도 없는 곳인데, 어쩐 일인지 그의 말만 들어도 눈 앞에 에리키아가 보였다. 에리키아 성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본 그 풍경이...
류위닝은 잠시 아련한 눈동자로 기억 속을 헤매다 이내 다시 친근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보았다. 그는 정말로 에리키아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서 가슴 속을 한껏 메우는 애정과 그리움이 보였다. 나도 이 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올 무렵이면 그와 같은 마음이 되어있겠지. 나는 그를 보며 따스하게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멋진 곳인 것 같구려. 에리키아는.”
“그렇답니다. 전하께서도 곧 느끼시게 될 거예요.”
류위닝의 두 눈동자가 어쩐지 촉촉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내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고 싶지 않은지 이내 과장된 자부심과 긍지와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아까 넥타 강이 눈부시게 반짝인다고 했는데, 그러면 혹시 보통 강보다 더, 유난히 반짝인단 말이오?”
류위닝은 마침 기다렸던 주제가 나왔다는 듯 신난 표정을 지었다.
“네! 넥타 강의 반짝임은 단연 다른 어떤 강의 추종도 불허한답니다! 그래서 저와... 제 친구들도 그 이유를 궁금해한 적이 있었죠. 오죽하면 다같이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관찰 연구를 해보았답니다.”
대체 강물이 얼마나 반짝였길래 그렇게까지 했단 말인가?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였소?”
“제 똑똑한 친구의 관찰에 의하면, 넥타는 강폭에 비해서 깊이가 얕고 유속이 느려서 수면이 거울처럼 평평한 데다, 강이 정확히 동에서 서로 흐르기에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질 때까지 내내 강의 모든 부분에 햇살을 받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친구 말이라면 다 믿으니 함께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요.”
나는 푸하하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학구적이구려.”
류위닝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지 나를 따라 웃었다. 그렇게 눈꼬리가 내려간 채 웃는 그의 얼굴은 무척 부드러운 데다 약간의 수줍음도 담고 있어서 놀랍도록 정답게 느껴졌다. 정말로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형 같았다.
장릉혁적소문 장링허자이샤오원 류우녕 개시추리파2
댓글
꺄~ 저렇게 멋진 선배라니... 안그래도 기대되는 에리키아와 넥타강이, 실존하지 않는 파라다이스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