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링허적소문 류위닝 <영원한 가을> 6 (完)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가 심장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얼굴을 묻고 심장을 토해낼 정도로 절규하는 꿈. 그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게, 아버지와 형이 죽었던 어린 시절보다도 더 애통하게.
눈을 떴다. 정신이 몽롱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온 몸으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신이 흐느적거리고 힘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내고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귓전에 남자의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류위닝이었다. 그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배신감에 이를 갈며 적대적인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의 그런 눈빛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송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전하의 안전을 위해 부득이하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미 한 번 그에게 어마어마하게 속은 터라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의심과 경멸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머리와 어깨 아래로 팔을 넣어 나를 안정적으로 일으켜 앉혀 주었다. 그의 이런 극진한 태도에 나는 더욱 오싹한 기분이 되었다. 모리 제국에서는 적국의 포로라면 왕족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다루기로 악명이 높은데, 그는 대체 뭘 위해 나에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포섭하려는 것일까?
그의 부축을 받아 앉으니 서서히 몸에 힘이 돌아오고 정신이 맑아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아까 앉았던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기절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일으켜 준 후 다시 맞은편으로 돌아가 앉은 류위닝이 염려하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두 시간 정도 주무셨습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류위닝은 난처한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대가 단지 모리 제국의 첩자라면 어째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여 내 환심을 샀소? 또 사진첩에 있던 나와 안티노티아의 백작의 사진은 어디서 난 거요?”
류위닝은 고개를 숙이더니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그리고 내가 마침내 답답함에 고함을 칠 무렵, 그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주본 그의 얼굴은 지극한 낭패감과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대체 어째서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이 기묘한 상황은 뭐란 말인가?
그때 류위닝이 내게 나지막이 물었다.
“전하. 지금이 몇 년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능멸당한 기분이 들어 그에게 쏘아붙였다.
“나를 천치로 아는 거요?”
그러나 화가 났던 것도 잠시, 나를 보는 류위닝의 더없이 진지하고 가슴 아픈 눈빛을 보자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기이한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심쩍고 못마땅하게 말했다.
“제국력 436년이잖소.”
류위닝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참담함과도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은 제국력 445년입니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류위닝이 일어나더니 객실 문을 열어둔 채 밖으로 나갔다. 열린 문을 통해 나를 흉흉하게 바라보며 감시하는 군인들이 보였다. 내가 얼이 빠진 채 류위닝이 한 말을 곱씹고 있는데,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류위닝이 다시 문을 닫으며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말린 신문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내 앞에 앉더니 정중하게 그것을 내밀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것을 받아든 뒤 펼쳤다.
1302년 9월 10일
이 신문은 모리 제국의 신문으로 모리 제국력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모리 제국력으로 1302년이면 우리 제국력으로는 445년이 맞았다... 류위닝의 말대로... 이 신문은 정말로 제국력 445년의 신문인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시선을 들었다. 류위닝은 차분하고 인내심 있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가빠졌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거요?”
류위닝은 잠시 나를 응시하였다. 그리고 담담하며 서글픈 음성으로 말했다. 진실을.
“전하께서는 지난 9년간의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나는 입을 벌렸다. 뭐라고?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9년간의 기억이 없다고? 분명히 어제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게 9년 전이라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류위닝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리고 말했다.
“7년 전, 오버케언이 모리 제국에 큰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 이후 전하께서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손에 쥔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면을 넘기며 기사를 찾는데, 마침내 ‘전쟁’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7년 전 전쟁 중 무너졌던 사원을 마침내 재건해냈다는 기사였다.
정말로 전쟁이 있었단 말인가?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런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었다면...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설마 오버케언 연맹이 패배했소?”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류위닝은 깊은 숨을 쉬고는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물었다.
“그러면 나의 칼리스텐 왕국은 어떻게 됐소?”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류위닝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말했다.
“멸망하였습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슴을 부여잡았다. 어찌 이럴 수가... 어떻게... 나에게 조국이 없다고?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그러면 나의 왕가는? 궁정은? 숙부는?
나는 고개를 들고 다급히 물었다.
“그러면 왕숙은?”
류위닝은 지극한 안타까움과 위로를 담아 답했다.
“전하의 왕숙께서는... 멸국 전 병으로 붕어하셨습니다. 하여 전하께서 칼리스텐 왕국이 멸망하기 전 반 년 동안 국왕 폐하로서 통치를 하셨지요. 멸국 후, 모리 황실에서는 칼리스텐 정궁을 그대로 보존하여 전하께서 지내실 수 있도록 윤허하였고...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들 또한 그대로 두었습니다. 다만 오버케언 군대는 해산되어... 이번에 동행한 군인들은 모두 모리 제국군입니다.”
그래서 주아헌은 하루아침에 십 년이 늙어 보였고... 그래서 호위병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었구나.
부왕과 모후께서 다스리셨던 나의 왕국이... 내가 왕세자로 나고 자란 조국이, 나의 책임이었던 나의 나라가... 부모님과, 왕숙과, 형님과 함께 했던 유년시절의 따스한 고향이... 나의 집이... 돌아갈 곳이 없구나.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머리를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문득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다. 나는 급히 그에게 물었다.
“안티노티아의 백작은, 그는 어떻게 되었소?”
류위닝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나는 아득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나의 따스하고 그리운 샤오원... 아, 나의 샤오원. 네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니. 다시는 볼 수 없다니.
류위닝은 목이 멘 채 말했다.
“전하와 저의 좋은 벗 자이샤오원은... 오버케언 제국에 차출되어 패전 직전 전사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으신 것입니다.”
아아, 차디찬 전장에서.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나의 가여운 샤오원... 나의 친애하는 벗, 나의 사랑하는 이. 그렇게 먼저 갔구나. 아아, 떠나온 세월 속에 너를 묻고 왔는데 내가 그것을 몰랐구나.
나는 참아보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심장을 토해낼 듯이 고통스럽게.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모후도, 부왕도, 형도, 숙부도, 샤오원도... 모두 내 곁을 떠나가는데 지켜주지 못했다. 붙들지 못했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나를 그리는 이도, 기다리는 이도, 아껴주는 이도 아무도 없구나. 모두 나만 두고 떠나가 버렸구나. 또다시 나 혼자 뒤에 남겨졌구나. 이제 정말로, 아무도 없구나.
류위닝은 손을 뻗어 나의 어깨를 가만히 짚고 위로하였다. 그도 같이 울기 시작했는지 그의 손이 떨렸다.
얼마나 울었을까. 나는 허망하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더 이상 왕세자도... 열여덟 살도 아닌 거구려... 그저 스물일곱 살의 몰락하고 기억을 잃은 한 남자일 뿐...”
류위닝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위로했다.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소중히 여기셨던 것들이 더는 세상에 남아있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닦은 뒤 말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구려... 더 이상 왕세자가 아니면서 왕세자로 행세하고, 영원히 해보지 못할 것들을 해낼 것이라 호언하고... 오직 나라는 비루한 그림자 밖에는 남지 않은 과거의 영광을 끌어안고서...”
“전하...”
류위닝은 힘 있는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일깨우듯 내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전하께 말씀드린 것들은 모두 정말로 있었던 일입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사셨던 삶입니다. 단지 기억하지 못하실 뿐이지요.”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기억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전쟁이 나기 전 약 2년 동안 샤오원과 저와 함께 에리키아에서 수학하셨고, 정말로 하숙집에 묵으셨으며, 정말로 학생회에 가입하여 친구들을 사귀고, 저와 함께 선술집 테이블에 올라가 노래를 하셨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이르지 못할 아름다운 꿈만 같았다. 나의 삶에 그런 찬란한 순간들이 있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류위닝은 눈물 젖은 눈으로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바스 출신인 저는 본래대로라면 학생회에 가입할 수 없었을 텐데, 그때 전하께서 저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또한 아까 제가 얘기했던 밝은 눈동자의 군인, 지엔틴도 전하의 학우였습니다. 그 친구도 바스 출신인데 전하께서 추천해서 학생회에 들어가게 해 주셨지요. 그리고 저는 정말로 전하와 샤오원의 절친한 벗입니다.
전하께서 그때 저를 추천하여 그 학창시절을 경험하게 해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전하의 그 찬란한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오늘, 이 기차 위에서, 전하께 이 모든 것들을 말씀드릴 수 없었겠지요.
비록 바스 공국이 훗날 모리 제국의 속령이 되어 저 또한 모리 제국군에서 칼리스텐의 적으로 싸웠으나... 저는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에리키아의 그 학창시절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그 순간들... 그 기억들이 제게는 영원토록 놓아버리지 못할 그리움입니다.”
그런 것이었구나... 내가 기억의 저편에 두고 떠나온 친우가 샤오원만이 아니었구나... 이처럼 나를 잊지 않은 나의 정다운 친우. 류위닝, 너를 내가 잊었었구나.
류위닝은 애달픈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전쟁 중 큰 공을 세워 대령이 되었고, 그렇게 모리 황제의 눈에 들어 부마가 되었습니다. 하여 공작위와 원수 지위도 받게 되었지요. 그 덕에 저는 종전 후 부족하나마 제가 가진 재량으로 기억을 잃으신 전하께서 예전처럼 지내시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충격으로 열여덟 살 이후의 기억을 잊으셨고, 언제나 조만간 에리키아로 떠날 것이라 믿으시며 매일 같은 날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사셨습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전하의 시간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지요. 하여 저는 전하를 치료할 수 없다면 전하를 편안하게라도 해드리고자, 전하 주변의 모든 이에게 그 해 이후의 일을 함구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나도 전하께서 계속 에리키아로 떠나려고 하시기에...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황제 폐하께 윤허를 얻어 전하를 에리키아로 보내 조금 더 행복하게 지내시게 해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비록 샤오원을 만나실 수는 없어도... 전하께서는 다음 학기에 샤오원이 올 것이라 믿고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실 테고... 비록 제가 약속드린 일들을 우리가 다시 함께 하지는 못할지라도, 전하께서는 적어도 옛 시절 그대로인 하숙집에서... 매일매일을 학기가 시작하기 전의 평온한 하루라 생각하며, 그 즐거운 순간들이 앞날에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며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만 제가 미흡하여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네요. 성공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랬구나. 나는 이렇게나 몰락했지만 이렇게나 큰 우정을 누리고 있었구나. 따스하고 서글펐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말했다.
“나는... 그것도 몰랐구려. 괜히 그대를 의심하고... 미안하오.”
류위닝은 맑은 눈으로 따스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 셋은 참으로 좋은 벗이었나 보오. 그래서 그대가 나와 샤오원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류위닝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지금껏 내가 본 중 가장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습니다. 그 날이 봄 불꽃 축제 날이었지요. 급하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전하와 샤오원, 그리고 저는 같은 사진을 여러 장 현상해 나누어 가졌어요. 제 사진첩은 전하께서 궁에서 가져온 것을 선물해 주신 것이지요.
그 날이 샤오원이 전하보다 한 학기 늦게 처음으로 에리키아에 도착한 날이었는데, 기차역 사고로 불꽃 축제가 시작될 때까지 미처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전보가 와서 전하께서 애를 태우셨지요. 하지만 불꽃 축제가 시작되기 불과 몇 분 전에, 마치 기적처럼, 전하께서 쪽배를 타려고 기다리고 계시던 넥타의 나룻터에, 샤오원이 나타났습니다. 전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전 역에서부터 배를 구해 타고요. 그리고 두 분은 함께 쪽배를 타고 눈부신 불꽃놀이를 보셨지요.”
아아... 봄 불꽃 축제... 샤오원과의 약속... 참으로 아름다웠겠구나... 내 인생에 그토록 찬란한 순간도 있었구나... 지금은 이렇게 볼품없이 되어 버렸지만 나도 한때는 그렇게 빛났었구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기억해 내고 싶은데... 손에 쥐어 보고 싶은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구나. 잃어버렸구나. 그 순간들을...
나는 눈물 속에서 서글프게 말했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겠구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구려. 나는 기억하지 못하니...”
류위닝은 애달픔에 미간을 찌푸리고는 나를 보며 결연히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내 기억 속에 새기듯.
“어찌 의미가 없겠습니까. 전하의 삶에 그처럼 찬란한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전하라는 사람이 그토록 값진 순간들을 딛고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어찌 의미가 없겠습니까.
저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 에리키아에 도착하셨던 전하의 상기된 얼굴, 저와 처음으로 선술집 테이블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시던 모습, 제복을 입고 행진하실 때 횃불의 그림자에 일렁이던 미소, 불꽃놀이가 시작되기 전 나룻터에 도착한 샤오원을 힘껏 품에 안던 순간 전하의 그 애틋한 얼굴...
전하께서 기억하지 못하실지라도, 모두 세상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전하의 그 모든 찬란한 순간들을 제가 곁에서 함께하였고, 지금 이 순간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기차가 산 그늘을 벗어나 평야로 나아가자 늦오후의 황금빛 태양이 창문으로 비쳐 들었다. 객실 안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류위닝의 눈동자가 그 빛을 받아 옅은 갈색으로 빛났다.
그는 나의 떨구어진 두 손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그 깊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전하, 제 마음 속에서 전하는 영원한 왕세자 전하십니다. 전하께서는 따뜻하고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계세요.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여도 그 가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세상이, 안타깝게도 더 이상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뿐이지요.”
류위닝은 간곡하고도 힘 있게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진 않을 겁니다. 에리키아에서 정다운 장소들을 다시 찾아가 보세요. 우리가 함께 거닐고, 즐거워하고, 사랑했던 장소들을 되짚어 보세요. 저 또한 보름에 한 번은 꼭 전하를 찾아 뵙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올 것이라 믿습니다.
전하께서 지금껏 떠나간 것들을 안타까워하셨듯이, 앞으로도 그처럼 떠나보내기 안타까울 아름다운 순간들을 삶에서 만나실 것이라 믿습니다. 에리키아에 오기 전의 전하께선 훗날 그 기억을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모르셨듯이, 지금은 모르고 있는 무수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또한 전하의 앞날에 있을 것을 믿습니다. 부디 강녕하시어 그 순간을 보시길, 저와 함께 그 새로운 추억들을 훗날 돌이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하의 찬란한 과거를 기억하는 제가, 전하의 찬란할 앞날을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니, 나의 정다운 벗. 전하께서도 부디 그때까지 강녕하십시오. 나의, 빛나는 태양 링허.”
눈물이 흘렀다. 터져 나오는 울음 속에서 나는 친우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류위닝은 나의 등을 감싸며 함께 울었다. 우리는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그렇게 한참동안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열여덟의 그 가을이 영원한 것처럼.
그래... 지금은 흐릿해진 그 찬란한 순간들이, 그 영원한 가을의 따스함이, 그럼에도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할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이 친우와 함께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보며 이 또한 빛나는 시절이었다 말할 수 있기를.
기차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고, 넥타 강의 찬란한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산 위의 붉은 성과 아치형 다리가 보였다. 에리키아였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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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전하께서 지금껏 떠나간 것들을 안타까워하셨듯이, 앞으로도 그처럼 떠나보내기 안타까울 아름다운 순간들을 삶에서 만나실 것이라 믿습니다. 에리키아에 오기 전의 전하께선 훗날 그 기억을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모르셨듯이, 지금은 모르고 있는 무수한 아름다운 추억들이 또한 전하의 앞날에 있을 것을 믿습니다'ㅠㅠㅠㅠㅠㅠ 이렇게 가슴시리게 아름답고 슬픈 결말일줄 몰랐네ㅜㅜ 그냥 이대로 영화화하면 세기의 명작이 될듯.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멋진글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