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업] 미아 06~10

01-05

 

06. 그게 이번 내 생일 선물이면 좋겠어요.

 

향긋한 꽃내음이 진동하고, 형형색색 나비가 날아다니던 봄이 지나가고,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 되었다. 이제는 마당에 나가 가만히 서 있기에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계절이 되었는데도 보보와 룬룬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몇 시간 째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집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해관은 자신이 더위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체력이 다른 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기에 저 아이들이 대단한 거로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면 오죽 좋을까. 얌전히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처음 이 집에 와서 낯을 가리던 룬룬은 딱 한 달 만에 완벽하게 제2의 보보가 되었다. 그나마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다면, 식사 시간에 조용히 밥을 먹는 것뿐이었다.

룬룬이 처음 보보의 방을 구경한 날, 책장 앞에서 한동안 서성이는 모습을 본 해관이 읽어도 좋다고 허락을 했었다. 그러자 며칠 동안 룬룬은 앉아서 책만 읽었었다. 옆에서 보보가 놀자고 하면 대충 시늉만 내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보보의 방에 빼곡히 꽂혀있는 동화책을 잘 읽나 싶더니만, 책장의 두 번째 줄에 꽂혀있던 책들을 마지막으로 룬룬은 더는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물론 그에 영향을 끼친 건 부정할 수 없이 보보였다. 룬룬이 입술을 앙다물고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으면, 정확하게 10분 만에 보보가 징징거리기 시작한다. 놀자아, 노오올자아아. 이것만 보고. 여기까지만 볼게. 결국 절반도 읽지 못한 룬룬은 책을 덮고 보보와 놀아야 했다.
혹시 룬룬이 보보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냐는 삼촌의 말에 해관은 룬룬에게 당부했다. 보보가 조른다고 하여서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보보가 룬룬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룬룬이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해도 된다고. 룬룬은 싱긋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아예 책은 안중에도 없게 된 두 아이를 보며 해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다가 살이 타다 못해 빨갛게 달아올라 피부 껍질이라도 벗겨지면 며칠을 고생할 게 틀림없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두 아이에게 해관은 어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물론 단번에 들어올 리 없기에 해관은 나름의 강수를 두었다.


"빨리 들어온 사람, 아이스크림 두 개!"
"나! 보보가 두 개야!"
"룬룬은? 룬룬은 두 개 아니야?"
"어?"
"히. 룬룬, 두 개."


이제는 서로에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나빠! 라는 외침이 하늘로 울려 퍼졌고, 두 아이의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의 동시에 해관의 품 안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자신에게 아이스크림 두 개를 달라며 양손을 쭉 내밀었다.


"일단 씻자. 그리고 형이 보기에 둘이 동시에 도착했으니까 둘 다 아이스크림 두 개. 어때?"
"좋아! 보보도 두 개, 룬룬도 두 개. 그렇지?"
"응! 좋아."
"둘 다 초코랑 바닐나?"
"아냐. 보보가 초코랑 바닐라야."
"룬룬은 초코랑 딸기야."


형아 바보야? 아이들은 맑은 두 눈으로 해관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해관의 넓은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세상에,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아이스크림이 거기서 거기지, 바닐라랑 딸기의 차이가 뭐가 있다고 자신에게 이러는 것인지. 그리고 바닐라와 딸기를 구분해서 준다고 한들, 결국은 둘이 섞어서 먹을 거 아니니? 해관은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두 아이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어차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씻을 거니까 비눗물만 잘 헹구고 나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해관과 그저 마당에서 흙 놀이를 하다가 욕실에서 물장구를 치는 게 좋은 두 아이의 완벽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다. 아마 계인이 보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테지만, 감시인이 없으니 맹랑한 세 미성년자는 아주 제멋대로였다.

그러다 계인이 돌아오면, 아이가 스무 명은 있는 것처럼 시끌벅적한 집안이 조금 조용해진다. 그러니까 아이가 스무 명에서 다섯 명으로 줄어든 정도만큼 조용해진다. 종일 지켜봐야 하던 해관은 이만큼도 얼마나 절간이나 마찬가지냐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계인은 우다다 뛰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인 두 아이를 앉혀두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잔소리를 들어봤자 그때뿐, 보보와 룬룬은 약 다섯 걸음 정도 살금살금 걷는가 싶더니만 다시 우다다 뛰어다녔다.
그래, 차라리 체력이라도 빼서 일찍 잠자리에 들 거라. 계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서재로 들어갔다.


"샤오보보. 곧 생일인데 생일 선물로 가지고 싶은 거 있어?"
"붕붕이!"
"얼마 전 어린이날 선물로 받았잖아. 다른 건?"
"그건 룬룬도 받았잖아! 이번에는 다른 거!"
"붕붕이가 세 대잖아. 타는 사람은 룬룬이랑 샤오보보밖에 없는데, 붕붕이가 세 대면 한 대가 남네? 안 돼."
"그럼 형아가 타."
"형은 안 들어가."


해관의 말에 보보와 룬룬은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동시에 붕붕이에 들어가지 않아 슬픈 삶을 살고 있을 해관을 위해 저들이 더 열심히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붕붕이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왜 사느냐. 욕실에서 큰 소리를 내니 천장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해관은 거품이 묻은 손 그대로 두 아이의 입을 막아버렸다.


"샤오보보. 붕붕이는 안 돼. 다른 거 생각해서 말해줘. 그러고 보니까 룬룬은 생일이 언제야? 형이 모르고 있었네. 아직 지나간 건 아니지?"
"룬룬 생일은, 괜찮아요."
"왜 괜찮아? 형이 안 괜찮은데."
"보보도! 생일에는 생일 축하합니다~ 해줘야 해. 안 하면 안 돼."
"룬룬은 한 적이 없는데."
"응? 룬룬은 왜 한 적이 없어?"
"생일 축하합니다. 한 적이 없어."


해관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을 집이었겠지. 굳이 캐묻지 않아도 알법 했다. 보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고, 룬룬은 눈치를 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괜한 물장구만 쳤다. 해관은 그런 룬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조용히 달래주었다.


"이제부터 삼촌이랑 형이랑 보보가 해줄 거야. 그래도 될까?"
"룬룬 생일에 해줄 거예요?"
"보보가 먼저 할 거야! 보보가 제일 많이 해줄 거야! 룬룬도 보보 생일에 제일 먼저 해줘야 해. 그럴 거지?"
"보보 생일에 룬룬이 해줘도 돼?"
"아가. 보보 생일에 안 해줄 거야? 아가가 해줘야 하는데. 아가가 해줘. 응?"


보보는 입을 삐쭉 내밀고는 룬룬을 아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일종의 필살기였다. 룬룬에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며 칭얼거릴 때, 룬룬과 뭐든 같이 하고 싶을 때, 보보가 룬룬을 설득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그럼 룬룬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보보가 하자는 대로 했다.


"응. 할게."
"아싸!"
"샤오보보. 앉아. 형한테 물 튀잖아."
"그럼 형아도 씻어!"
"형아는 이따가 너희 나가면 씻을 거야. 그럼 룬룬 생일은 언제야?"
"룬룬은 십하고 이십 일이요."


아직 시계도 보지 못하고, 날짜도 제대로 세지 못하는 아이였지만, 해관은 아는 만큼 말하는 룬룬이 대견했다. 10월 21일. 달력에 표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휑한 달력에 색칠할 날이 또 하나 늘었다. 그 사실에 해관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럼 혹시 룬룬은 가지고 싶은 선물이나 이루고 싶은 소원은 있어? 보보가 참고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보보는 무조건 붕붕이거든."
"붕붕이가 좋거든!"
"꼭 지금 말해야 해요?"
"그건 아니지. 룬룬 생일 선물이니까 룬룬이 말하고 싶을 때 말하면 돼."
"소원을 말하면, 이뤄지는 거예요?"
"응?"
"소원을 말하면, 원하는 걸 말하면 가질 수 있는 거예요?"


해관은 룬룬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선뜻 하지 못했다.
소원을 말하면 이뤄지냐고? 자신의 경험상 답은 언제나 '아니오.'였다. 차라리 스스로 움직이고 노력해서 결과를 쟁취하는 거면 모를까, 하찮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신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건 신이 아닌, 언제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리기만 한 이 아이에게 가혹한 현실을 알려줄 용기가 해관에게는 없었다. 엄마가 너를 버렸고, 엄마는 너를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찾는다고 한들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닐 거란다. 네 생일조차 축하하지 않은 이기적이고 못난 엄마는 잊으렴. 해관은 살짝 울먹이려고 하는 룬룬의 눈동자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신을 속였다고 화를 냈는데, 룬룬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계인이 자신에게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는지를 드디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이 맑디맑은 아이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 더러운 사실을 입에 올리겠어. 해관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응. 그 소원이 무엇이든 이뤄질 거야."


해관의 대답에 룬룬은 더 밝은 미소를 지었다.

 

 

 

07. 하지만 올해에도 생일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룬룬이 보기에도 보보의 생일은 대단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아침을 시작으로 계인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눈곱이 대롱대롱 달린 채로 조용하게 아침밥을 먹는다. 그래도 생일 당사자인 보보는 많이 들뜬 모습이긴 했다. 평소보다 더 들떠서 계인이 조용히 하라는 잔소리를 해도 그저 방실방실 웃기만 했었다. 그런 보보를 보며 생일이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룬룬이었다.
계인이 출근하고, 해관이 아이들을 씻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조금 거친 해관의 손길이었지만, 보보와 룬룬은 꽤 적응해서 해관의 움직임에 따라 얼굴을 함께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얼굴과 머리카락에 물을 잔뜩 묻히고서 거실로 나가려는 보보를 간신히 붙잡은 해관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모습에 룬룬은 보보와 함께 장난을 쳐도 될지, 자신만은 얌전히 있어야 할지 고민했다.


"샤오보보! 좀! 얼굴만 닦자. 응? 물은 닦아야지! 야! 뛰지 말라고!"
"형아. 과니 형아."
"룬룬. 형은 룬룬 때문에 살아. 룬룬이 있어서 다행이야. 저 망아지보다 더 날뛰는 놈 따위."
"룬룬 눈 아야 할 것 같아."
"응? 아이고! 룬룬도 물기 닦아야지. 미안해. 샤오보보 때문에 룬룬 닦는 거 늦었지? 미안해?"
"괜찮아요. 그런데 형아. 보보는 선물 골랐어? 소원은 말했어요?"
"아직. 같이 물어볼까?"
"룬룬도 물어봐도 돼요?"
"샤오보보의 소원을 함께 들어주면 좋은 거니까. 형이랑 같이 물어보자."
"네."


소원을 빌어본 적도 없던 룬룬이라서 남의 소원은 어떻게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해관이 곁에 있으니 알아서 잘해주리라 믿었다. 룬룬이 생각하기에 계인을 제외한 어른 중 가장 믿음직스러운 어른은 해관이었다. 그래서 해관이라면 뭐든 다 해줄 거라는 신뢰가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샤오보보. 이리 와봐."
"싫은데!"
"생일 선물은 안 줘도 되는 거야? 올해 생일 선물은 필요 없어?"
"아니! 해, 줘! 보보 주세요!"
"그럼 얼굴부터 닦고 로션 바르고 말하기로 하자."
"싫은데."
"뭐야, 샤오보보. 선물 받기 싫다고?"
"아니! 안 싫은데!"
"어서 와. 룬룬은 얼굴 닦고 로션까지 발랐어."
"룬룬. 왜 이렇게 빨라?"
"보보 소원 들어주려고. 보보가 소원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보보 소원 들어주려고 빨리했어."


룬룬의 말에 보보는 만세를 외쳤다.
아까부터 외치고 있던 만세라서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해관은 그 틈을 타 보보의 잠옷을 훌러덩 벗겼다. 갑자기 들어난 맨살에 보보는 춥다고 징징거리다가 후다닥 룬룬에게 다가갔다.


"아가. 보보 안아줘."
"보보 물 있어. 안 돼."
"소원이야. 안아줘."
"응? 생일 소원이야? 왜?"
"아가가 보보 안아줬으면 좋겠어."


소원이 왜 안아주는 거람.
보보의 소원이 이해 가지 않은 룬룬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고, 보다 못한 보보가 룬룬을 먼저 꼭 껴안았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그동안 좋은 환경에서 잘 자고, 잘 먹었던 보보였던지라 룬룬보다 조금 커서 룬룬이 보보의 품 안에 쏙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생일 선물이 안아주는 거라고 해서 평소에는 안지 않느냐 한다면, 절대로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고 다니고, 갑자기 벌레를 봤다며 부둥켜 않고, 잠을 자야 할 때도 손을 꼭 잡거나 낮에 무서운 일을 봤다 치면 둘 사이에 빈틈없이 서로를 안고 자곤 했다. 그래서 보보의 소원은 해관조차 이해 가지 않았다.


"샤오보보. 형도 안아줘도 돼?"
"아니. 형아는 다른 소원이야."
"왜? 룬룬은 안아주는 거고, 형은 다른 거야? 불공평한데?"
"아가니까. 아가는 꼭 안아주는 거로 됐어. 형아는 어른이잖아. 어른은 달라."


영 틀린 말도 아니라서 해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괜히 보보에게 다가가 조금 거칠게 얼굴에 남아있던 물기를 닦았다. 아프다고 악을 지르는 보보를 살포시 무시하고서 치덕치덕 로션까지 바르고 난 뒤에야 보보를 품 안에서 놓아주는 해관이었다. 보보를 놓아주는 해관의 표정이 묘하게 후련하다고 느껴지는 건 룬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룬룬은 여전히 보보의 소원에 대해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해관에게서 해방이 된 보보가 룬룬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리고 통통한 룬룬의 볼을 한 번 꾹 누르고, 룬룬이 자신을 쳐다보자 꾹 누른 그 자리에 뽀뽀했다.


"아가. 예뻐."
"보보."
"응. 아가야."
"아가 말고 룬룬이라고 해."
"음. 아가라고 하면 안 돼?"
"보보랑 룬룬은 친구인데, 왜 자꾸 아가라고 해?"
"아가는 아가니까. 맞지?"


룬룬은 보보의 얼굴에 담긴 알 수 없는 슬픔에 차마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에서 둘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해관이 보보를 다시 불렀다.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느 정도 추위에 적응했던 보보는 싫다고 했지만, 선물을 사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별수 없이 해관에게 가야만 했다.


"샤오보보."
"왜. 바보형아."
"룬룬은 아가가 아니야."
"왜? 아가야! 두 밤이나 잠을 자는 건 아가가 하는 거야."
"그건 룬룬이 아파서 그랬던 거야. 아가여서 그런 게 아니야."
"아니야! 아가야!"


보보는 해관의 부정에 울음을 터트렸다.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엉엉 우는 보보를 달래는 건 오롯이 룬룬의 몫이었다. 룬룬은 작은 손으로 보보의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열심히 닦았다. 하지만 룬룬의 손길로도 벅찰 정도로 보보는 울음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보야."
"흐어엉. 아가아. 아아가!"
"보보야. 아가 여기에 있어요."
"흐윽. 아가야?"
"응. 보보한테 룬룬이 아가 할게."
"끅. 보보도 오늘만 아가라고 할게. 소원은 그걸로 할래. 그래도 돼?"
"그래. 오늘은 룬룬이 보보 아가야."


결국, 보보의 생일 선물은 그날 동안 룬룬을 안고, 아가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붕붕이라도 사줄까 하는 마음에 해관이 보보에게 슬쩍 물어봤지만, 웬일로 보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필요 없다고 했다. 심지어 해관에게 말할 소원까지 룬룬에게 말했으니 괜찮다는 대답도 들었다.
그 보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대답을 들은 해관은 차라리 붕붕이 나을 것 같았다. 아가라고 불러주던 부모가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져서 더는 들을 수 없는 그 말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이에게 해도 되는 게 소원이라니. 부모가 자신에게 했듯이 아이에게 하는 걸 보는 게 그리 썩 즐겁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이후 정말로 보보는 룬룬을 아가라고 부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보의 생일이 지나고, 금세 룬룬의 생일이 되었다.
나날이 신기록을 세우던 더위가 꺾이더니 노랗고, 빨간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계절이 시작되었다. 보보와 룬룬은 마당 여기저기에 떨어진 단풍을 줍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계절이 바뀌었지만, 땀을 뻘뻘 흘릴 때까지 뛰는 건 바뀌지 않았다. 저렇게 뛰다가 땀이라도 식으면 감기에 쉽게 걸릴 날씨라서 해관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아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아플 때도 함께 아파서 해관만 죽기 직전까지 고생해야만 했다.


"둘 다 그만 뛰고 들어와! 간식 먹자."
"간식 뭐야?"
"뭐예요?"
"팬케이크야."
"초코 시럽!"
"딸기 시럽!"
"그래. 둘 다 뿌려줄 테니까 빨리 들어와."
"형아! 초코만이야!"
"딸기만이야요!"


그러니까 어차피 둘 다 섞어서 먹을 거 아니냐고.
참 변함없는 둘이라서 해관은 열심히 들어오라는 손짓만 했고, 그 손짓에 보보와 룬룬은 얌전히 한쪽 손에는 단풍을, 한쪽 손에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해관의 감시 아래에서 단풍은 거실 한쪽에 잘 두고, 욕실로 가서 손까지 야무지게 씻은 후에야 세 사람은 주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방 식탁에는 따뜻하게 구워진 팬케이크가 두 장씩 담긴 그릇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조금 작은 초록색 접시 두 개는 보보와 룬룬의 것, 조금 큰 파란색 접시는 해관의 것.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정해진 규칙이었다. 만약 계인까지 있었다면, 흰 자기에 학이 그려져 있는 접시였을 것이다.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아서 배가 고프긴 했는지, 보보와 룬룬은 허겁지겁 팬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관의 예상대로 따로따로 시럽을 뿌렸으나, 절반도 먹기 전에 이미 두 그릇은 하나가 되어 초코와 딸기가 잘 섞여진 상태로 변했다. 저래서 따로 뿌린 의미가 있기나 할까. 해관은 매번 궁금했지만, 그때마다 바보라는 소리만 들어서 더는 묻지 않았다.


"곧 룬룬 생일이네?"


해관은 입가에 잔뜩 묻히고 먹고 있는 보보와 룬룬의 얼굴을 차례로 닦아주었다.


"응. 룬룬 생일이에요."
"룬룬, 소원은? 보보가 다 들어줄게!"
"룬룬 소원은."


생일이란 이야기에 조금 시무룩한가 싶더니, 룬룬은 소원을 물어보는 해관과 보보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해관이 그동안 룬룬을 지켜본 결과, 룬룬은 욕심이 없어 보였다. 가지고 싶은 거나 사소하게 먹고 싶은 과자라도 룬룬은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남의 집에 있어서 눈치라도 보는 걸까. 잠시 걱정을 했지만, 보보가 장난칠 때나 말도 안 되는 땡깡을 부릴 때마다 룬룬이 옆에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룬룬의 생일에는 반드시 룬룬이 원하는 소원을 듣는 게 해관의 소원이었다.


"말 해봐! 형이 뭐든 다 들어줄게."
"보보도!"
"어떤 거든 상관없어요?"
"그럼! 비행기도 사줄 수 있어!"
"와! 보보도 사줘!"
"안 돼. 룬룬 생일이잖아."
"아, 맞다. 보보도 다 들어줄게!"
"그럼, 룬룬 소원은요."


드디어 열리는 룬룬의 입술에 해관과 보보는 반짝이는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어요."


차라리 비행기가 낫겠다.
순간 정적이 흐르던 식탁에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보보와 룬룬은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고, 해관은 둘을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해관도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08. 그래서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룬룬의 생일은 시월 어드메다. 만약 룬룬에게 생일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룬룬은 대충 그렇게 대답하곤 한다. 시월 정도예요. 저기 구름이 지나간다고 말하는 듯이 별일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하고 다시 입을 다문다. 룬룬에게는 가장 아무 날도 아니고, 별 날도 아닌 그런 순간이다.
언제나 그랬고, 영원히 그러기를 빌고 또 빌고 있다. 생일에 별일이 생기지 않기를, 생일은 그저 시월 어느 날이기를. 특별한 기념일도, 특별하게 대단한 날이 아니기를 전날 밤 잠드는 순간부터 생일이 지나가는 그 시간까지 룬룬은 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그게 룬룬이 바라는 가장 큰 선물이기도 했다.


유치원은 다니지 않았다. 보보가 싫어했다.
룬룬을 그렇게 좋아하고, 룬룬을 그렇게 따르던 보보가 룬룬이 다른 아이들과 웃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리 없었다. 룬룬의 곁에 선생님이라도 가려고 하면 빼액하고 울면서 저리 꺼지라는 소리까지 해댔고, 해관은 죄송하다고 허리를 숙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결국 단 일주일 만에 유치원에 가는 걸 포기했었다. 단 몇 시간 만이라도 편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해관으로서는 조금 슬픈 일이 되었지만, 보보는 오로지 자신만이 룬룬을 본다는 생각에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룬룬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다른 아이들을 만나면 만나는 대로 만나지 않으면 만나지 않는 대로 괜찮았다.

그렇게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그 시기에 계인과 해관이 조금 바빴던 거로 기억한다. 룬룬에게 질문을 많이 했었고, 수많은 종이를 들여다보고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아 보였다. 어린 보보와 룬룬의 눈에는 그저 자신들과 놀아줄 틈도 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어차피 둘이 놀면 되었으니 아이들은 계인과 해관이 바쁜 이유는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야 그 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계인과 해관 덕분이었다는 걸 알았다. 엄마의 손에 직접 버려진 아이를 아무 대가 없이 어느 집에서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를 맺게 해줄까. 성인이 되어서까지 언제나 룬룬의 보호자는 남계인이었고, 계인과 해관의 그늘 덕분에 룬룬은 더위와 추위를 느끼지 않는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룬룬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입학식이 다가왔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는 초봄이라서 아이들은 두꺼운 옷을 잘 챙겨입고 해관의 양손에 붙들려 초등학교로 향했다. 흥얼흥얼, 어젯밤 티비에서 보았던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는 두 아이는 그저 즐거웠다. 어디를 가는지 아는 것 같은데, 딱히 관심사는 아닌 듯했다. 그냥 룬룬과 함께라서, 보보와 함께라서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샤오보보랑 룬룬은 이제 초등학생이야."
"초등학생이야!"
"그럼 형아야!"
"그래. 형이네. 학교도 다니고. 오늘만 형이 데려다줄 거야. 앞으로는 보보랑 룬룬이 둘이서 학교에 다녀야 해."
"그럴 거야! 형아 필요 없어!"
"그런데 룬룬은 길 모르는데요."
"괜찮아! 보보가 알아! 룬룬은 보보만 따라와!"


보보는 주먹을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제 초등학생이 되니 길 찾기 정도는 시켜봐야겠다는 계인의 말에 해관은 보보와 룬룬에게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었다. 함께, 혹은 각각. 함께일 때는 보보와 룬룬이 서로의 손을 꼭 그러쥐고서 해관이 건네준 약도를 보며 목적지까지 잘 찾아갔다. 해관의 쪽지에 적혀 있는 물건도 잘 사오고, 돌아오는 길에 장난을 치느라 샛길로 새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잘 돌아왔다. 그리고 보보가 홀로 심부름을 할 때도 여차여차 잘 해내긴 했었다. 룬룬과 함께 갈 때보다 딴짓을 많이 했고, 이것저것 구경도 많이 했고, 사 오라는 물건보다 본인과 룬룬이 먹을 군것질거리를 더 많이 사 오긴 했지만, 집으로 잘 돌아왔다.
하지만 룬룬은 아니었다. 룬룬은 집을 나가서 대로까지는 잘 나갔다. 아니, 거기부터 잘못되었다. 대로로 나가서는 안 되는데 룬룬은 곧장 대로로 향했다. 해관이 쥐여준 약도를 보는 것 같은데도 룬룬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완전 엉뚱한 곳이었다. 혹시 나쁜 사람을 만날까 봐 룬룬의 뒤에서 숨어있던 해관은 당황한 나머지 룬룬을 멈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저러다가 다시 원래 길로 돌아가겠지. 보보가 이리저리 팔랑팔랑 돌아다니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대로가 나은 편이니까. 해관은 마지막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룬룬은 대로의 한쪽에 있던 정류장까지 걸어갔다가 근처에서 주저앉은 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를 부르는 룬룬의 울음에 해관은 당장 뛰쳐나가 룬룬을 껴안았다.

그제야 해관은 룬룬의 상태를 눈치챘다.
그동안 보보와 해관이 있어서 울 틈이 없었던 룬룬이었고, 자신이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 상태였었다. 그러다 홀로 밖을 나가야 하고, 홀로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룬룬은 예전 엄마의 퇴근길을 마중 나가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는 길을 곧잘 찾았었지. 엄마의 손을 잡지 않아도, 한 번도 헤매지 않고서 그 작은 집에서 대로의 정류장까지 잘 내려갔지. 그리고 심지어 지금은 약도까지 있다. 룬룬은 조금 자신 있었다.
그런데 해관의 약도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약도를 보고, 길을 보고, 다시 약도를 봤지만, 룬룬은 약도에 적힌 길이 어떤 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약도에 그려져 있는 길과 눈 앞에 펼쳐진 길은 너무나 다른 길이었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걷기 시작했더니 예전 그 정류장이 나왔다.
그 순간 룬룬은 엄마가 떠올랐고, 드디어 자신이 엄마에게 버려졌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룬룬의 상태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해관의 품 안에 안겨 엉엉 울어서 퉁퉁 부은 두 눈과 한쪽에는 약도를, 한쪽에는 동전 주머니를 꽉 쥐고는 놓지 않아서 양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룬룬의 모습에 보보도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 두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할 기력이 해관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씩 울음이 그치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해관은 아이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뒤로 룬룬은 밖을 나가야 할 상황이라면, 보보의 손이나 해관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보보가 룬룬 손 놓으면 안 돼."
"안 놓을 거야. 우리 놓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그렇지? 룬룬도 보보 손 놓으면 안 돼."
"응. 절대로 안 놓을 거야."


보보와 룬룬는 새끼손가락을 꼭꼭 걸었다.
해관은 보보와 룬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꾹 참아야 했다. 그래서 일부로 더 밝은 척하며 근처 문구점으로 보보와 룬룬을 이끌었다. 갑자기 입학 기념 선물로 사탕을 사준다는 해관의 말에 보보는 경계를 했고, 룬룬은 웃었다. 막대 사탕을 받을 때까지도 보보는 해관이 절대로 그냥 줄 사람이 아니라면서 툴툴댔다. 그 모습에 해관은 사탕 껍질을 까서 보보의 입에 욱여넣었다. 착한 일을 하는 데도 핀잔을 들어야 한다니. 애를 잘못 키운 것이 틀림없다.


"감사합니다."
"샤오보보는 왜 감사하다고 안 해?"
"집에 가면 뭘 시키려고?"
"뭐?"
"형아가 간식을 준다는 건, 책을 읽어야 하거나 받아쓰기를 하거나 덧셈 뺄셈을 해야 하는 거잖아. 보보는 이제 형아야. 다 알아."
"룬룬은 괜찮은데."
"야! 안 시켜! 줘도 싫은 소리를 들어야 하냐!"
"룬룬. 너무 착하면 안 돼. 저 형아가 보기보다 나빠."
"보보는 왜 싫어?"
"싫어. 머리 아파."


해관은 정말 딱 한 대만 쥐어박고 싶었다. 보보의 동그란 이마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부들거리는 주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입학식이었으니까. 그것도 초등학교 입학식. 유치원도 가지 않은 두 꼬마가 처음 겪는 대형 행사니까 어른인 자신이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왜 삼촌은 오늘도 바빠서 이 악마를 맡아야 하는 걸까. 하긴 한 손에는 천사를 한 손에는 악마를 잡고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조화로운 모습이긴 했다.
잘 꾸며진 두 도련님의 등장에 학교 대강당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아이들은 어느 반에 배정이 될까. 조금 어려 보이지만 잘생긴 형의 손을 꼭 잡은 도련님은 대강당에 있는 그 어떤 아이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귀엽고 잘 생겼다. 여자아이들은 두 도련님의 모습에 얼굴을 붉혔고, 어머님들은 잘생긴 형의 모습에 감출 수 없을 정도로 광대가 올라갔다. 그 모습에 남자아이들은 입을 삐죽이며 살짝 토라졌고, 아버님들은 헛기침하면서 불편한 티를 냈지만, 잘생긴 형의 딱 벌어진 어깨와 우뚝 솟은 키에 눈을 돌려야만 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 반응에 관심을 주지 않고, 자신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1학년 8반 5번, 24번.
다행히 같은 반이었다. 번호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한 반이라는 사실에 보보와 룬룬은 기뻤다. 해관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같은 보호자라서 배정이 저렇게 된 듯했다.
지겨운 교장 선생님의 연설이 끝나고 반으로 가서 담임선생님과 만남이 있었다. 그렇게 입학식이 끝나고, 보보와 룬룬은 해관의 양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부터는 등굣길은 해관이, 하굣길은 선생님의 지도 아래에 이뤄질 거라고 했다. 보보와 룬룬은 손을 꼭 잡고서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아주 작은 사건이 있긴 했다. 선생님이 임의로 자리를 배정해줬지만, 보보는 룬룬과 앉지 않으면 학교를 오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결국 보보는 룬룬과 앉게 되었다. 처음 보보의 옆에 앉아서 내심 좋았던 여자아이는 자지러지게 우는 보보 때문에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날 엄마의 손을 잡고 돌아갈 때까지 여자아이는 룬룬을 노려보았고, 룬룬은 괜히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 옆에서 보보는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09. 어차피 너도 내 손을 놓았으니까.

 

보보와 룬룬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나서 드디어 해관에게 자유의 시간이 생겼다.
아직 저학년이라서 오후 2시면 하교를 하고 2시 30분 정도에 집에 도착을 하므로 오전 시간만 간신히 사수하지만, 그래도 해관은 너무 좋았다. 몇 년 전까지는 1분이 아까워 일어나서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뛰어다니는 보보와 룬룬 덕분에 쉴 틈이 없었고 살찔 틈이 없던 해관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새 푸짐하게 올라오려고 하는 뱃살이 조금 거슬리긴 했다.


"샤오보보! 일어나! 룬룬은 이미 일어났는데!"
"어어."
"일어났어? 얼른 세수해. 오늘 체육 수업이 있다고 했지? 체육복 챙기고!"
"으응."
"룬룬, 오늘 당번이라고? 당번을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니야?"
"응. 당번이에요. 아침 당번하면 마지막 청소는 안 해도 되거든. 차라리 그게 나아. 집에 빨리 오잖아."
"그럼 보보가 청소할 때는?"
"책 읽으면서 기다리면 돼요. 형, 나 먼저 가도 돼요?"
"보보한테 같이 가자고 하자. 길을 잃으면 어떡해."
"괜찮아. 벌써 3년이나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그 길을 모르면 어떻게 해."


이제야 두 눈을 비비며 2층에서 내려오는 보보와 달리 룬룬은 야무지게 책가방까지 메고서 집을 나설 채비를 끝냈다. 해관은 조금 불안한 눈초리로 룬룬을 바라봤지만, 룬룬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서재에서 나오는 계인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해관에게 손을 한 번 흔든 뒤 집을 나섰다.
어렸을 때는 항상 길을 잃은 룬룬이었기에 어디를 갈 때마다 해관이나 보보가 따라나섰다. 등굣길과 하굣길도 마찬가지였다. 작년까지 항상 보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등교하던 룬룬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3학년이 되었다며 조금씩 따로 다니기 시작하더니, 등교까지 각자 할 때가 늘기 시작했다.
해관이 보보를 바라봤지만, 보보는 여전히 잠에 서려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샤오보보."
"그 샤오라는 말 좀 하지 마. 나 이제 샤오 아니야."
"보보야."
"어."
"룬룬이 먼저 학교에 갔어. 괜찮을까?"
"내가 어떻게 알아."
"뭐? 샤오보보. 너 지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 몰라!"


오히려 제가 더 성을 내더니 화장실로 쏙 들어가 버리는 보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해관은 난감했다. 그 모습을 보던 계인이 보보가 나오면 자신이 혼내주겠다고 하였지만, 출근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곧바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있었다면 자신보다 더 잘 돌봐주지 않았을까. 자신도 어린 나이였고, 부모가 있던 기간보다 없던 기간이 더 긴 해관이라서 아이들이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하나도 몰라 답답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렀다.
3월도 어느덧 중순이 되어 마당에 조금씩 꽃이 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바람은 차가웠다. 그런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해관에게 목덜미에 소름이 삐쭉 솟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네,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 들릴 때 상담을 받겠습니다. 네.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해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룬룬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정확히는 첫 등교 날부터 지금까지 1교시 전에 학교에 도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하교 시간이 다 되어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경찰관의 손을 잡고 학교에 왔다고도 했다. 보호자에게 전화한다고 하자, 이 맹랑한 꼬마는 자신에게는 부모가 없고 보호자라는 이름 아래에 후원자가 있는데 그분이 오겠냐는 말까지 했단다.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야 담임은 알고 있었지만, 보호자가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후원자로 전락했을 줄이야. 하필 올해 보보와 룬룬의 반이 달라서 학기 초에 보보의 반에 먼저 들린 게 이 사달이 나버렸나보다. 룬룬의 반에 가려고 하자 보보의 반 앞에 있던 룬룬이 담임 선생님이 바쁘셔서 일찍 퇴근하셨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당연히 그 후에는 룬룬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아서 해관도 까먹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해관은 재빨리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휴대폰을 사줘야겠다고 생각만 하다가 보보가 게임만 할까 봐 룬룬까지 사주지 못했다. 오늘은 두 녀석에게 핸드폰을 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룬룬을 찾는 건 정오가 지나 태양이 정수리 바로 위에 올라간 시각이었다.
룬룬은 사무실이 잔뜩 있는 거리의 한 커피숍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지나가는 회사원들이 룬룬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걸었지만, 룬룬은 그저 바닥을 보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해관은 큰 소리로 룬룬의 이름을 불렀다.


"등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서였을까.
룬룬의 고개가 번쩍 들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해관은 성큼 거리는 발걸음으로 룬룬에게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 해!"
"해관이 형."
"여기서 뭐햐나고 물었어! 등륜!"
"형."
"일어나. 따라서 와. 너 오늘 정말 혼날 줄 알아!"


해관은 룬룬의 한쪽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질질 끌다시피 룬룬을 잡고 걸어갔다.
룬룬은 해관이 이끄는 대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해관은 제 옆에서 묵묵히 뛰는 걸음으로 걷고 있는 룬룬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학교에 갔다가는 자신이 걸려서 안 될 것 같아 룬룬의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룬룬을 찾았다는 말과 오늘은 쉬겠다는 말을 전한 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자신은 아메리카노, 룬룬은 딸기 프라프치노를 시켰다.


"룬룬. 형한테는 숨기지 않고 말했으면 좋겠어. 형은 룬룬을 보보랑 같이 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형한테 숨기는 게 있으면 형이 아주 슬플 것 같아."
"형."
"응. 말해 봐."
"가족이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엄마도 나를 버렸는데, 형이 나를 버린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아요."
"룬룬."
"정말로 괜찮아요. 형."
"그럼 보보한테 물어봐도 돼?"
"네?"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보보는 말하겠지. 걔는 단순하잖아. 조금만 건들이면 알아서 말할 애잖아. 그렇지? 걔 입에서 어떤 말이라도 다 하게 하는 게 좋을까. 룬룬, 네가 말하는 게 좋을까?"


해관의 부드러운 협박에 룬룬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자근자근 씹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대신 보보한테 말하지 말아요. 그리고 보보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래. 알겠어."
"약속해줘요."
"약속할게."
"3학년이 되고 나서 보보랑 함께 등교하지 않아요."


그건 알고 있었다. 그랬으니까 네가 처음 오는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었겠지. 해관은 인내심을 가지고 룬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자고 다짐했다.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한 아이에게 괜히 겁을 줄 생각은 없었다.


"작년까지는 보보랑 같이 다닌 건 맞아요. 그런데 올해는 반도 달라졌고, 작년에 저를 싫어하던 여자아이가 저랑 같은 반이 되었어요."


룬룬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해관의 미간은 깊은 주름이 생겼고, 평소 느껴본 적 없던 심한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연신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1학년 때부터 룬룬을 싫어하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1학년 처음 옆자리에 앉을 짝을 정할 때 보보가 룬룬과 함께 앉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보보와 앉지 못한 그 여자아이였다. 2학년 때는 다른 반이 되었나 싶더니, 올해는 보보와 떨어진 대신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나 보다. 그런데 여전히 룬룬을 싫어하고 있었는지 그 아이가 반에 룬룬에 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 룬룬이어서 아직 반에서 친한 애가 없어서 자신의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걸 몰랐다고 한다. 룬룬에게는 부모도 없고 집도 없어서, 보보네 집에서 얹혀산다고 이야기했단다. 그리고 항상 보보가 데리고 다닌다고, 보보 똘마니냐는 이야기부터 남자애 둘이서 손잡고 다니니까 둘이 결혼할 거냐고, 동성애자냐는 비하도 했는데, 그걸 보보가 들어버렸다.
당연히 보보는 아니라고 큰소리로 고함을 쳤고, 여자아이라 때릴 수는 없던 보보라서 혼자 씩씩대며 화를 냈단다. 그런데도 여자아이는 멈추지 않았고, 동성애자는 병이라고 장애인이냐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그 이야기까지 들은 룬룬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니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부터 보보가 함께 가지 않아요. 처음에는 제가 뒤따라가기는 했는데요. 이제는 그러기에 보보네 반 애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해서요. 따로 가려고 했어요. 그래서 혼자 가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어서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죄송해요."


누구의 잘못일까. 누가 잘못된 걸까.
너의 잘못이 아니란다. 보보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거야. 보보가 네가 싫어서 함께 가지 않은 것이 아닐 거란다.


차라리 보보의 잘못이라고 엉엉 울기라도 하면 함께 욕을 하며 달래주기라도 할 텐데, 자신의 잘못이라고 서럽게 눈물만 뚝뚝 흘리는 룬룬에게 해관은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조용히 자신의 옆에 앉혀서 룬룬의 작고 여린 어깨만 다독여줄 수밖에 없었다.
보보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왜 함께 등교하지 않았냐고 묻지는 않을 테지만, 당분간 해관과 함께 등교하자는 약속을 받았다. 홀로 길을 나섰다가 또 이렇게 길을 헤매다가 학교를 가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지라 룬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늘은 집에 가서 룬룬이 좋아하는 햄을 구워주기로 했다. 그리고 룬룬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도 잔뜩 사기로 했다.

 

 

 

10.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으니까.

 

더이상 서로에게 보보라고 불리지도, 룬룬이라고 불리지도 않게 되었다.
나이가 두 자리로 되었고, 머리가 좀 자랐다고 싫고 좋음이 더욱 명확해져만 가는 두 아이였다. 덕분에 곁에서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해관만 곤욕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제 슬슬 회사로 돌아와서 경영을 배워야 한다는 계인의 당부가 있었다. 작년까지는 그럭저럭 대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핑계와 아이들이 어리다는 이유를 들면서 회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삼촌인 계인이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직계 가족은 해관이니 마지막에 회사를 맡아야 하는 건 너여야 한다는 계인의 말을 마냥 거절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나이가 한둘씩 늘어간다는 건, 해관에게도 아이들 말고도 책임져야 하는 게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보와 등륜은 11살, 해관은 24살이 되는 해였다.

여전히 이보와 등륜은 따로 등교했다. 다만 이보는 제시간에 나가 제시간에 학교에 도착했다면, 등륜은 계인보다 더 빨리 집을 나가서 이보보다 더 늦게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수위아저씨가 등륜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학교 문을 닫는다. 등륜의 반 담임선생님도 등륜의 지각을 눈감아주었다. 처음에는 매일 지각하는 등륜을 고깝게 보던 반 아이가 엄마에게 일러 항의가 들어오기는 했으나 수업 시간이 아닌 쉬는 시간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무마시켰다.
물론 그 뒤에는 해관의 도움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찾아가 등륜이 그동안 상담받았던 정신과 의료기록을 제출했고, 등륜의 반에는 여러 번 간식을 넣어주기도 했다. 안 된다는 선생님의 만류가 있었지만, 아이가 피해를 보니 제발 부탁드린다며 허리 숙여 부탁하는 해관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보만 반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등륜은 3학년 마지막 날까지 지각했다. 그리고 해관은 이보에게는 말하지 않겠다던 등륜과 한 약속을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그렇게 4학년이 되었다. 4학년이 되어서도 이보와 등륜은 다른 반에 배정되었다. 등륜의 부탁이었고, 해관은 탐탁지 않았으나 아무 생각 없이 말하지 않을 등륜의 성격을 알아서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담임 선생님에게는 이보와 등륜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같은 반이 되면 등륜이 많이 힘들어질 거라는 말로 내년에도 다른 반에 배정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각하는 걸 제외하면 등륜은 매우 성실한 학생이었고, 성적도 상위권에 들었기에 담임 선생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개학식 날, 해관은 가장 먼저 등륜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3학년 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등륜의 담임 선생님께 찾아가서 등륜의 진료기록을 보여주었다. 의사의 자세한 설명이 적힌 진단서도 함께 첨부했다. 새 담임 선생님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미간에 깊은 내천 자 주름을 만들었지만, 일단 3월 한 달 동안 지켜본 뒤 연락을 주겠다고 답하긴 했다. 해관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하긴 이제 11살인 아이가 유치원생보다 더 길을 못 찾고 헤메는 것도 모자라 학교 오가는 길도 모른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해관은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이보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이보의 담임 선생님과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면 호되게 혼을 내주라는 당부만 한 뒤 회사로 돌아갔다.

해관의 걱정과 다르게 3월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등륜의 새 담임 선생님은 등륜의 상태를 잘 이해하고 받아드렸는지 별다른 연락이 없었고, 이보의 담임 선생님은 이보를 완벽하게 휘어잡았는지 3학년 때보다 말썽 피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물론 그만큼 해관도 바빠서 아이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기는 했다. 어떨 때는 등륜과 비슷한 시간에 나가서 계인이 퇴근하는 시간보다 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회사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서툰 일투성이라서 더욱더 힘들었다.
집에 들어오면 잠자기 바빴고, 눈 뜨면 씻고 출근하기 바빴다. 그래서 아이들의 얼굴을 본 날이 계인보다 더 적었고, 당연히 대화한 횟수는 일주일에 고작 몇 번이었다. 열 번은 했을까, 그 정도 하면 많이 한 주간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등륜과는 출근 시간이 겹치면 짧은 대화를 하긴 했다.


"룬룬."
"네. 형."
"요즘 학교 가는 건 어때?"
"그냥, 그래요."
"수업은 재밌어?"
"그것도 그냥 그래요."
"여전히 지각하고? 오늘은 형이."
"아니요. 그래도 혼자 가볼게요. 누가 데려다주면, 정말 평생 혼자서는 못 갈 수도 있잖아요. 죄송해요.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단호한 등륜의 거절에 해관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벌써 혼자 걷는 걸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면 나중에 정말 아무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야 어리니까 경찰서에 거리낌 없이 간다고 해도, 나중에 다 커서도? 길을 잃어서 그러는데요. 찾아주세요. 어떤 다 큰 어른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들어도 지금부터 차근차근 좋아지는 게 낫겠지. 그리고 주말마다 해관의 손을 잡고 상담도 꼬박꼬박 받는 등륜이니 차차 나아질 거라고 여겼다.
대충 대로까지 함께 내려간 해관과 등륜은 그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해관은 정류장이 있는 오른쪽으로 등륜은 학교가 있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해관은 발길을 멈추고 등륜이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등륜의 뒷모습이 보였다.
몇 미터를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꽤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가서 도와줄까. 하지만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등륜의 모습과 지금 가지 않으면 오늘의 퇴근 시간은 내일 아침 9시가 될 거라는 예감에 해관은 다시 발길을 돌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 후 몇 번 정도 더 해관과 등륜은 함께 집을 나서곤 했다.
딱 대로까지만 함께 걸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둘이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대로에 도착하면 다시 해관은 오른쪽으로 등륜은 왼쪽으로 몸을 돌려 각자 갈 길을 걷는다. 해관은 조금 빠르게, 등륜은 매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여름이 되어 학교에서는 기말고사까지 끝났다는 문자가 날라왔다. 곧 1학기 성적표가 발송될 예정이니 학부모는 확인 후 상담을 받으라는 문자를 연달아 두통이나 받은 해관이었다. 학기 초 방문한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해관도 회사에 적응을 잘하고 있었고, 업무도 수월하게 제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다.
며칠 뒤 정말 이보와 등륜의 성적표가 담긴 봉투 두 개가 집에 도착했다. 별 기대 없이 보긴 했으나 너무나 예상했던 대로 적혀있는 성적표에 해관은 헛웃음을 지었다. 한 성적표에는 모두 우수하다는 성적에 관한 평가가 적혀있다면, 한 성적표에는 활발하고 친구들과 두루두루 친하다는 성격에 관한 평가만 적혀있었다. 이름을 가리고 봐도, 이건 우수한 성적표는 등륜의 것이고 성적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건 이보의 것이었다.

두 성적표를 보면서 그렇게 즐겁지는 않아도 나름 잘 다니고 있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다. 성적이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거니까. 두 아이에게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평가를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 해관이기에 어떤 성적표든 괜찮다고 느꼈다. 누구의 담임 선생님부터 뵙는 게 좋을까. 오랜만에 월차를 내고 회사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해관은 너무 신났다.
매일 아침 잘 떠지지 않은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만원 버스에 올라타서 지하철까지 이동한 다음에 지옥철을 타고 30분을 움직여야 하는 지옥을 하루라도 겪지 않는 게 너무나 행복했다. 차라리 말썽꾸러기 두 명을 맡는 게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회사에 있으면 1분에 12번은 더 하곤 했다. 그냥 아이들이 중학교 다닐 때까지 회사에 다니지 않는다고 할까. 그때가 되면 회사가 조금 만만해질까. 회사에서 일을 배우려면 낙하산이더라도 밑바닥부터 올라와야 한다는 계인의 철저한 원칙이 있어서 지금이나 나중이나 결국 말단 신입사원이겠지만.


상담은 싱겁게 끝났다. 등륜은 전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이었고, 이보는 큰 사고는 치지 않지만, 공부에 흥미가 없는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였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두 담임 선생님 덕분에 해관은 아이들의 하교 시간보다 더 일찍 학교를 나와야 했다.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외식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보와 등륜에게 학교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보에게는 오늘 반 친구들과 농구를 하기로 해서 안 된다는 문자가, 등륜에게는 올해는 도서부원이라 수업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느라 늦을지도 모르고, 그 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가야 해서 안 될 것 같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착한 형 노릇을 하려고 했더니, 어째 두 꼬맹이가 도와주지를 않는다. 어차피 곧 방학이기도 하고, 시간은 많을 테니 오늘은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해야겠다는 생각에 해관은 알겠다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이보등륜 이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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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9585a] - 2024/10/30 00:21

미친 내센세 입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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