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업] 미아 01~05

 

01.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길을 잃는 거다.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다는 말은 단순히 가고자 하던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길 한복판에 가만히 서서 행인들을 멀거니 보기만 했다. 바삐 걷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째 나만 비정상처럼 느껴졌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조금도 슬프지 않기는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굳이 손꼽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오래전부터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지금도 분명 손에는 작은 건물 이름까지 적혀있을 정도로 자세히 그려진 약도가 들려있었고, 다른 손에는 GPS가 탑재되어 현재 내 위치가 반짝거리는 핸드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길을 잃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나는 묻지 못했다. 만약 물었다가 그 사람이 알려준 방향이 또 엉뚱한 방향이면 어떡해?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간절했다. 매번 길을 잃어 경찰서까지 찾아가 때늦은 미아 취급을 받는 것이 익숙한 나지만, 공인된 사람이 아닌 타인의 이끎은 믿지 못하는 희한한 인간이다.

그 순간 핸드폰 화면이 까맣게 변하며 수신화면으로 바뀌었다.
화면에 동동 떠 있는 이름과 전화번호는 매우 익숙한 그의 것이었다. 어, 또 늦었구나. 하지만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는다. 변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가 전화했다는 것만으로 이제 이 지긋지긋한 이질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받으려고 했는데,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잘 참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다급하게 구르고 있는 구두 소리가 들렸고, 조금 거친 호흡 소리도 들렸다. 그가 뛰고 있나 보다. 매번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 위해 다급하게 뛰곤 했다. 무엇이 그리 급할까. 어차피 나는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매번 나를 놓칠세라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란, 사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순간이다. 꼭 변태 같네.
전화를 끊고 나는 길가로 비켜섰다. 그가 달려올 테지만, 그가 오는 방향을 모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나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제 오려나. 적당히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대충 먼지를 털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하늘은 생각보다 더 은은한 하늘색을 띠고 있었고, 적당히 하얀 구름도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이따가 돌아가는 길에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걷자고 해야겠다.


여태 오지 않는 그 때문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손톱 거스름을 뜯어서 괜히 피를 보기도 하고, 손톱 끝 큐티클을 꾹꾹 밀어보기도 했다. 뻣뻣한 껍질을 뜯고, 밀면서 느껴지는 생소한 통증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열 손가락 끝을 괴롭혔는데도 그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길래 그가 이렇게 찾기 힘들어하는 걸까. 내가 선택했던 갈림길 중 어떤 선택지가 잘못되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틀린 게 없었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나는 약도를 따라, 그리고 반짝이는 GPS 흔적을 따라 잘 걸어왔더니 여기였는 걸. 입을 삐죽거려 앞에 없는 상대를 향해 투덜거렸다.

물론 나도 내가 병신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그가 있어서 티가 덜 났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괜찮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가 없는 지금처럼 홀로 남게 되어야 하는 상황에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나는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연신 참기 위해서 하늘도 보고, 볼도 빵빵하게 불어봤지만, 한 번 뚝 떨어진 눈물은 터져버린 수도꼭지처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우는 건 썩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눈물을 없애기 위해서 눈을 벅벅 소리가 날 정도로 닦았다. 여린 눈가가 조금 따가운 생각이 들고서야 나는 손을 내렸다. 왜 이렇게 병신인 건지, 조금만 덜 병신이어도 좋으련만. 평생 발전이 없을 내가 너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저절로 숙어진 고개와 웅크려질 대로 웅크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면, 스스로라도 채워야 하니까.


미안해. 늦었지?
네가 왜 늦어. 내가 잘못했는데. 아직 정돈되지 않은 숨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내 팔을 풀고, 어깨를 펴게 하고는 내 얼굴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알맞게 부어오른 빨간 눈가를 살포시 쓸어내리는 그의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나는 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내 손을 꼭 그러쥐고는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한쪽에 내팽개쳐져 있던 구겨져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약도와 아슬아슬 땅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어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매우 천천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에게 풀썩 안기는 꼴이 되었지만,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물론 내 입에서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그를 오래 기다렸고, 그만큼 그는 나를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는 증거인 셈이다. 덩치 큰 두 남자가 엉거주춤 붙어있는 꼴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까지 신경 쓰기에는 여전히 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별수 없이 그가 나를 다시 앉혔다. 그리고 곁에 따라 앉더니 내 정강이와 허벅지를 조물조물 주무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피가 돌기 시작하자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간지러웠다. 그래서 열심히 움직이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 이제 괜찮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도 천천히 일어났다.
아까보다는 나았다. 적당히 다리에 힘도 들어가고, 그의 얼굴을 제대로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땀이 채 마르지 않아 여전히 이마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꼴이라니, 평소 꾸미는 걸 좋아하는 그의 모습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툭 튀어나오더니 툴툴거리는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장난기가 어린 투정에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리까지 숙이라며 웃는 나를 보면서 그도 따라서 씩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는 다시 마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서로 맞잡고 있던 손에 동시에 힘을 주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그의 온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바빠?
아니.
그럼 걷자.
어디로?
우리 안 가도 돼?
안 돼.
그럼 가야 하는 곳까지만 천천히 걸으면 되지.
드디어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평소 걷던 보폭의 절반 이하로 꼭 거북이걸음처럼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그 보폭에 맞춰 나는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내가 왜 또 길을 잃었는지, 내가 얼마나 정확하게 가고 있었는지, 약도가 자세하다는 건 누구의 기준인지, GPS가 고장 난 것이 틀림없고, 요즘 사람들은 기계를 얼마나 맹신하는지. 변명이었다. 오늘도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조금이라도 내 잘못을 덜어내고자 했던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흐트러진 내 옷매무새를 정돈시키기도 했다. 적당한 대꾸도 하지 않는 말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심술이 났다. 얼른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또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어린 생각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의 앞에서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다섯 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다.
그는 그때보다 성장했는데, 나는 여전히 그때 그 어린아이였다.

파란 하늘 아래 산들거리는 바람에 얇은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얼마 남지 않은 꽃잎이 조금씩 떨어졌다. 고작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저 나무 아래에 수많은 사람이 서서 떨어지는 꽃잎을 잡겠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시간이란 참 야속한 존재다.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꽃잎이 신경 쓰여 나도 모르게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기막힌 타이밍에 떨어지고 있던 꽃잎이 내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라서 나는 그를 보며 자랑스럽게 꽃잎을 보여줬다.
그는 또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으면서 내 손에 달랑달랑 들려있던 꽃잎을 빼앗아갔다. 돌려달라고 칭얼거렸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늦었단다. 이제 아슬아슬하니 어서 가야 한단다. 어차피 늦었을 거 이제 와 서둘러서 뭐 하냐고 투덜거렸지만,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동갑인 주제에 그는 꽤 단호한 편이었다. 안 된다고 하는 거면, 어차피 억지를 부려도 안 될 테니 얌전히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늦었다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우리의 걸음 속도는 여전했다. 거북이와 시합을 해도 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천천히 발을 옮겼고, 보폭은 어린아이와 대결을 해도 질 정도로 좁은 보폭을 유지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이게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홀로 걸을 때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둘이 걷는 이 순간에는 이 보폭과 이 속도가 올바른 것이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말라 더는 머리카락이 붙어있지 않았다. 적당히 멋을 낸 그의 머리는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하늘거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의 손가락이 내 볼을 콕콕 찔렀다. 하지 말라고 그의 손을 잡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무얼 보고 있냐고 놀렸다. 한 번 놀림을 받으면 종일 들어야 한다는 걸 알아서 대충 얼버무리고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모르는 길 위에서 미아가 되는 것도 끔찍하지만, 출입구가 뻔히 있는 건물 안에서 방향을 헤매는 것보다는 나았다. 여기로 가고 저기로 꺾기만 하면 원래 있던 방이 나오는 데도 나는 꼭 그 방향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화장실을 가겠다고 나와서는 서너 층 위에 있는 곳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데리러 오는 건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게 더 비참했다. 길을 찾지 못한다는 건 그러려니 해도 건물 안에서 미아가 됐다는 건 모두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를 앞장세웠다. 네가 가지 않으면 나는 또 엉뚱한 곳으로 가버릴 텐데, 괜찮겠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표정을 본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내 손을 고쳐잡았다.



놓치지나 마.
그의 한숨 섞인 잔소리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02. 그래도 엄마, 나 여기까지 오는 길을 알아요.

 

하얀 얼굴에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을 가져 귀여워 보이는 아이가 엄마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좋은 노래보다 더 듣기 좋아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 번씩 쳐다볼 정도였다.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엽다는 말을 연신 내뱉을 정도로 아이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은 엄마의 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새끼손가락만 간신히 쥐고 있었다. 아슬아슬 매달려놓고도 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응? 우리 샤오룬룬, 왜 그럴까?"
"아이, 엄마! 나 이제 다 커서 샤오룬룬 아니야!"
"어머나, 그러면 이제 누가 엄마의 샤오룬룬이지?"
"우, 우음. 엄마의 샤오룬룬은 난데, 그거 난데."


엄마의 장난기가 어린 말에 아이는 금방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살포시 토라지더니 어느새 큰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까지 달리기 시작하자 엄마는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아 팔을 벌렸다. 팔을 벌린 엄마를 힐끔 보다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 것도 잠시, 아이는 엄마의 품 안으로 풀싹 안겨들었다.


"그럼. 엄마의 샤오룬룬은 단 하나밖에 없는 걸."
"웅. 맞아. 내가 엄마 샤오룬룬 할 거야!"
"그래. 엄마의 샤오룬룬이 되어줘서 고마워."
"엄마도! 엄마도, 샤오룬룬 엄마가 되어줘서 고마워!"


엄마도, 아이도 서로를 보면서 까르르 웃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사이좋은 모자라며 길가의 구멍가게 아줌마가 나와서 덕담 한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아이에게 손짓하더니 몇 살이냐고 물었다.


"이름은 룬룬입니다! 나이는 다섯 살!"
"아이고, 룬룬이야? 다섯 살이라니, 많이 커야겠네~"


아줌마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고, 아이는 마냥 좋다며 형아가 될 때까지 더 클 것이라고 으스댔다. 아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아줌마는 작은 막대 사탕을 꺼내 들며, 하나둘 숫자를 세어 딱 다섯 개를 건네주었다.


"자, 룬룬. 선물이란다. 나중에 형아가 되어서 오렴."
"아이, 참. 아주머니. 괜찮아요."
"아이가 귀여워서 주는 거야. 그리고 영 영특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잘 가르쳐."
"샤오룬룬.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짧은 혓소리를 내면서도 아이는 엄마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
통통한 배에 두 손을 야무지게 올려놓고, 꾸벅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또 귀여워 아줌마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 줄 걸 그랬다고 호탕하게 웃는 아줌마에게 엄마는 진짜 그러지 마시라며 손사래를 치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아줌마와 구멍가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돌아 짧은 팔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고, 아줌마도 엄마와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엄마와 아이의 집은 저기 저 높은 꼭대기 마을 위에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판잣집은 없다지만, 겉모습만 콘크리트로 바뀌었지 속은 별반 다르지 않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허름한 집에서 엄마와 아이, 그리고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싫었다. 무서웠고, 냄새나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 아이가 가장 많이 마주쳐야 할 사람은 불행히도 아버지였다.
엄마는 해가 뜨기 전에 일하러 나갔다가 하늘에 별이 우수수 뜨기 시작한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간 동안 아이는 최대한 집에 있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집 앞 거리에서 돌을 쌓아 장난도 치고, 가끔 운이 좋으면 이웃집 할아버지가 불러 밥을 먹기도 하고, 더 운이 좋으면 가끔 근처 뒷산을 오르내리기 위해 지나가던 등산객이 귀엽다며 주전부리를 쥐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오지 않을 때는 조금 떨어져 있는 동네의 놀이터를 가기도 했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노는 걸 좋아했지만, 자주 가지 않으려고 했다. 최대한 사람들이 오가지 않은 시간을 택하여 가야 하기도 했다. 처음 아이가 놀이터를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던 또래 친구들과 아줌마들이 아이를 보고 더럽고 냄새난다며 손가락질을 했었다. 듣지 않은 척, 모르는 척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아이의 귀에 박히기 시작한 나쁜 소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오곤 한다.
그리고 가장 최악인 것은 덩치 큰 형과 누나들이 올 때였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낄낄거리는 목소리며, 아버지에게 나는 냄새보다 더 역한 냄새가 그들에게 나서 다가가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애야~ 라고 자신을 부를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집으로 뛰었다. 그 뒤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 여러 개가 웃는 소리가 겹쳐 들려와 아이는 자신의 귀를 꾹 눌러야만 했다.

그렇게 어서 해가 지기를 고대하던 아이는 하얗고 노란 해가 저물어 주황색과 빨간색으로 하늘을 물들일 때가 되면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아이에게는 벅찰 내리막길이지만, 아이는 매우 익숙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굳이 얼마나 걸리는지 계산하지 않아도 충분히 오래 걸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이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내려갔다.
집에서 구름 할아버지 집까지 쭉 걸었다가 구름 할아버지 집을 따라서 골목으로 들어간다. 그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주황색 철문이 보이고, 그 주황색 철문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길을 본다. 그리고 다시 그 길을 따라 쭉 내려가다 보면, 이제는 봄마다 예쁜 분홍색과 빨간색을 뽐내는 장미가 피는 집이 나온다. 그 장미가 피는 집에서 다시 왼쪽으로 돌면, 커다란 집들이 양옆으로 쭉 서 있는 아이의 집보다 배는 더 넓어 보이는 길이 나온다.
그 길에는 차가 잘 다니지 않아서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이다. 주변을 빙빙 둘러보고, 팥죽색 담벼락에 짧은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재빨리 손가락을 때곤 했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장미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절마다 잘 어울리는 꽃들이 곳곳에 피어있곤 했다. 하지만 아이의 손은커녕 어른들도 닿지 못할 높이에서 피는 꽃이라서 아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도 한 송이 꺾어 엄마에게 건네줄 수 있는 장미 집이 백배 나았다.

아이가 한동안 장난질을 해댄 넓은 길이 끝나면, 끊임없이 차가 다니는 대로가 나온다. 그럼 아이는 침을 한 번 꼴깍 삼친 뒤 양옆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길가를 살펴본다. 여기서부터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오토바이와 자전거, 그리고 사람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엄마의 당부가 있었다.
자전거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고, 사람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연신 한숨을 내쉬는 회색 옷을 입은 아저씨가 지나가자 아이는 뒤를 따라 쪼르르 걷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나는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역하지 않아서 아이는 참을 만했다. 그 아저씨는 모르겠지만, 아이에게는 꽤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빙빙 돌아 집에서 이 도로까지 나오면, 매일은 아니더라도 며칠에 한 번씩은 보게 되는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아저씨는 아이의 목적지와 같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저씨는 살짝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더니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살짝 낡은 버스정류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휴, 아저씨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오면, 아이는 낑낑대면서 벤치에 힘겹게 올라앉았다. 짧은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서 아이의 다리는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한참을 다리를 흔들다가 지겨워진 아이는 아저씨의 곁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벤치에 아슬아슬 걸쳐진 아저씨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직 정확하게 시간을 볼 줄 모르지만, 오랜 학습 끝에 시곗바늘이 어느 정도에 오면 엄마가 오는지 알고 있었다.
음, 아직은 멀었어. 작은 바늘이 한 칸 더 움직여야 엄마가 도착할 것 같았다. 오늘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것저것 동네방네를 다 구경하면서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엄마가 오려면 더 기다려야만 했다. 엄마는 왜 그리 먼 곳까지 일하러 가는 것일까. 아버지는 왜 맨날 집에만 있는 걸까. 나는 왜 항상 혼자 있어야 하는 걸까. 단 세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을 뿐인데, 아이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 못된 질문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 그 먼 곳까지 일하러 간 것이다. 그러니 혼자 있어야 하는 걸 서운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아이는 작은 손을 꼭 쥐어 주먹을 만든 뒤 하늘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이의 눈은 그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이 담긴 것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나가던 어른이 보았다면, 얘가 참 맹랑하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곧바로 손을 내린 아이는 옆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사실, 아저씨에게 한 번도 말을 건네본 적은 없지만, 아이는 아저씨를 속으로 좋아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보다 아저씨 같은 사람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더 냄새나고, 더 무서웠으니까. 이렇게 냄새도 덜 나고, 말도 한마디도 하지 않아 덜 무서운 아저씨가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투덜거렸다가 난생처음으로 크게 혼나야 했다.
너를 낳아준 아버지에게 그 무슨 말이냐고. 아버지는 듣지도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라고까지 시켰고, 아이가 말을 할 때까지 옆에서 화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아이는 엉엉 울면서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빌었고, 아버지는 엄마에게 밖에서 애를 어떻게 행동시켰길래 들어오자마자 우냐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 엄마는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술상을 내오겠다고 살랑살랑 눈웃음을 쳤다. 그 덕에 아버지는 조금 진정이 된 듯했고, 아이에게 울지 말라는 말만 하고 다시 술을 마셨다.
그 뒤로 아이는 소원을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샤오룬룬!"
"엄마!"


아이의 눈이 조금씩 감기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엄마가 버스에서 내렸다.
엄마는 후다닥 버스에서 내려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의 눈에는 졸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지만, 아이가 고개를 저어 잠에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에 엄마는 살포시 미소를 지어 아이가 제품에 편히 기댈 수 있게 고쳐 안았다. 아이는 엄마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엄마의 향을 맡았다. 그리고 조금씩 말을 느릿느릿하더니 어느새 아이는 예쁜 두 눈을 살포시 감고, 잠이 들었다. 엄마는 아이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아이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었다.

한참을 아이를 안고 올라가던 엄마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내려왔을 때, 아이가 자기가 알고 있는 집 중에서 가장 큰 집은 저곳일 것 같다며 가리키던 집이었다. 엄마는 그 집 앞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이가 잠결에 칭얼거리자 그때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03. 그래서 내 손을 쉽게 놓은 건가요.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의 새끼손가락을 간신히 잡고 남은 팔을 팔랑거리며 엄마의 출근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따라 엄마의 출근 시간이 몇 시간이나 늦었다는 것, 아침 밥상에 올라온 반찬은 전부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었다는 것, 그 꼴을 보고서도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아버지는 즐겨보던 티비 채널이 아닌 아이가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던 만화 채널을 틀어주었다.
오늘이 룬룬의 생일인가 봐! 아버지도 나에게 잘해주고, 엄마가 맛난 것만 해줬어! 신이 난 아이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야 이야호~ 방금까지 보고 나온 만화에서 영웅인 주인공이 좋아하는 멜로디였다. 몇 번 보지도 않았으면서 아이는 그새 따라부르고 있었다.


"샤오룬룬. 그렇게 좋아?"
"응! 엄마! 오늘 너무 좋아!"
"뭐가 그리 좋은데?"
"으응~ 맛있는 것도 먹었고, 재밌는 것도 봤고, 엄마도 나랑 놀아주다가 일 가니까 좋아!"


아이의 말에 엄마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끌어당겨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엄마의 두 손안에 들어간 고사리보다 더 작은 아이의 손은 말랑말랑하고 참으로 따뜻했다. 그 온기에 엄마는 살짝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의 예쁜 눈동자가 흐릿하게 보일 때면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옆에 가만히 있어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아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샤오룬룬. 오늘은 집에 들어가지 마."
"응."
"아이, 착하네. 우리 샤오룬룬."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어?"
"우리 샤오룬룬이 알고 있는 가장 큰 집이 어디야?"
"저어기, 아래에 있는 동네에 놀이터 근처에 있는 집!"
"그래. 거기에서만 기다리고 있어."
"응."


엄마가 데리러 갈게.
아이의 대답은 항상 '응.'이었다. 아니라는 답은 아이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착했고, 똑똑했다. 엄마에게 아니라고 답해봤자, 싫다고 해봤자 자기 뜻대로 된 적이 없었기에 아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엄마는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엄마의 손길에 아이는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아이의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엄마는 아이의 볼에 뽀뽀했고, 아이도 신이 나서 엄마의 볼에 뽀뽀했다. 두 모자는 서로를 보면서 서로를 똑 닮은 예쁜 미소를 보여주었다.


"우리 샤오룬룬, 너무 예쁘다."
"우리 엄마도, 너무 예쁘다."
"엄마가 예뻐?"
"응! 세상에서 제일 예뻐!"
"샤오룬룬도 세상에서 제일 예뻐."


엄마는 끙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다시 고쳐잡고는 발걸음을 옮겨 부잣집이 즐비해 있는 그 골목길로 들어섰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번쩍 들었다. 짧은 팔을 휘휘 저으며 어느 한 집을 가리켰다. 아까 엄마가 말했던 여기에서 가장 큰 집, 아이가 지금까지 봤던 집 중에서 제일 큰 담벼락이 있어서 제일 예쁜 꽃이 피어있지만 꺾어서 엄마에게 줄 수 없을 정도로 큰 집, 그 집이었다.
아이의 손짓을 따라 엄마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듣기 좋다는 말도, 시끄럽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겼고, 큰 집 앞에서자 다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혔다.


"샤오룬룬. 엄마가 언제 돌아오지?"
"우음. 작은 바늘이 11에 가면 와."
"그런데 여기에는 바늘을 볼 수 있는 게 없어.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
"엄마가 올 때까지. 누가 룬룬 가자~ 해도 가지 않아."
"그래. 샤오룬룬. 엄마가 올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 어디에 가지도 말고, 여기에만 있어. 누가 집이 어디냐고 해도 모른다고 해. 그 어른이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가면 어떡해. 그렇지?"
"응. 맞아. 룬룬은 몰라요."
"그래. 샤오룬룬은 이제부터 집이 어디인지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에만 있어. 알겠지?"
"응. 엄마가 올 때까지 샤오룬룬, 여기에 있을 거야."


아이는 엄마의 당부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모른다고 답하라고 했으니, 그럴 것이다. 어디에도 가지 말고 여기에서 기다리라고 했으니, 그 또한 그럴 것이다. 엄마가 온다고 했으니, 여기에서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 놀이터도 못 가고, 구름 할아버지 집에서 밥도 못 먹는 건가. 아이는 잠깐 고민했다가 놀이터는 가까우니 다녀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놀이터마저 가지 못하게 막으면, 여기에서 기다리기엔 너무 심심할 테니까. 아이는 놀이터에 놀러 가는 건, 엄마에게 살짝 비밀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아이가 이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때 엄마 얼굴을 볼 걸. 마냥 신나던 내 옆에서 엄마는 무슨 표정을 짓고, 어떤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내 손을 그렇게 따뜻하게 잡아주었는지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엄마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서 뻔뻔한 표정으로 엄마를 볼 걸 그랬어.


엄마는 아이를 홀로 두고 일을 하러 길을 떠났다.
아이에게 잠깐 손을 흔들어주는 듯하더니 금방 등을 돌려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이는 위에 있고, 엄마는 점점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엄마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꼴이 되었다. 엄마를 뒤따라갈까? 아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따라갔다가 엄마가 왜 내려왔냐고 혼을 내면?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건 이골이 났다지만, 엄마에게 혼이 나는 건 아직도 슬플 정도로 싫었기 때문에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아이의 발 근처에 작은 돌덩이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엄마가 돌덩이 다섯 개로 공기라는 걸 알려주었지. 아이는 크기가 제각각인 돌덩이를 모아서 작은 손으로 한껏 쥐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돌이었는데도, 작은 아이의 손에서 두어 개가 또르르 떨어져 버렸다.
힝.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돌을 집어 들었다. 엄마가 가르쳐 줄 때도 돌 다섯 개를 전부 집어 들기 벅차해서 엄마가 까르르 웃곤 했었다. 여전히 돌 다섯 개는 벅찬 제 손이 너무나 얄미웠다. 그래서 아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조금 더 작은 돌들을 골랐다. 제법 괜찮은 크기의 돌을 고르고 골랐더니 어느새 태양이 아이의 정수리 위로 올라왔다.

이럴 때마다 구름 할아버지 집에 가서 재미난 만화도 보고, 맛있는 계란 후라이에 밥도 먹었는데. 엄마가 구름 할아버지 집에도 가지 말라고 당부해서 꼼짝없이 뙤약볕 아래에 있어야만 했다. 그늘이 하나도 지지 않은 길가에서 유일하게 그림자가 생기는 곳은 큰 집 대문 밑이었다. 혹시 사람이 나오지는 않을까,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큰 집 담벼락도 빤히 보다가 아까부터 움직임이 없는 대문을 다시 뚫어지라 쳐다봤다.
괜찮을 것 같다. 아이는 짧은 다리로 후다닥 뛰어가 대문 그림자 위에 살포시 앉았다. 아까보다는 나았다.
아직은 반소매를 입지 않아도 될 봄이 건만, 한낮 뙤약볕 아래는 여름보다 더 뜨거워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기에 더위를 꾹 참아 보았다.


정수리 위에서 강하게 내리쬐던 태양이 살포시 옆으로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살 것 같은 더위에 아이는 대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가 놀고 있는 큰 집에서 사람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근처 집들에서는 차도 나오고, 사람도 나오면서 아이를 힐끔 쳐다보곤 했다. 그중 몇몇은 아이에게 다가와 누구냐고 물었고,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름은 뭐야? 도리도리. 집은 어디니? 도리도리. 누구 기다리니? 엄마. 엄마를 기다려? 언제 오셔? 바늘이 11에 가면!
이름과 집을 말하지 않는 걸 빼면, 꽤 똘똘하게 답하는 아이라서 사람들은 몇 마디를 더 덧붙이다가 다시 제 갈 길을 가곤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이가 오전부터 있던 걸 봤던 이들이 귀여운 아이의 얼굴 때문이라며 달콤한 과자와 주스를 건네주기도 했었다. 그 덕에 아이는 배곯을 일은 없었다.

아이는 빨갛게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아직 까만색이 뒤덮어지지도 않았고, 반짝이는 별님도 콕콕 박히지 않았다. 즉, 엄마가 돌아오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점점 지겨워졌다. 뭘 더 하면서 놀고 있어야 할까. 사실 아이는 놀이터를 가지 않았다. 만약 그 찰나의 순간 엄마가 일찍 오면 어쩔 것인가. 오늘 늦게 일을 하러 간 만큼, 빨리 돌아오지 않을까, 아이는 실낱같은 희망에 지겨움을 꾹 참으며 어른들이 주고 간 과자를 조금씩 갉아 먹었다.
이건 너무 맛있어서 엄마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껴 먹었는데, 그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힝. 아이는 꼬르륵 소리가 나는 자신의 배를 살짝 때지 했다. 너는 왜 배가 고파서, 엄마를 못 주잖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도 된 듯, 아이는 고개를 처박아 자신의 배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혼을 냈다.



드디어 하늘은 어느 색도 담고 있지 않은, 새까만 색으로 변했다.
콕콕 박혀있던 별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두커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 아이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그려졌다. 엄마가 곧 온다는 생각에 아이는 너무나 행복했다. 오랜 시간 동안 쭈그려 앉아 있어서 다리가 조금 저렸고, 아침밥을 먹은 이후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고, 엄마가 가르쳐준 공기는 홀로 하니까 재미도 없고, 놀이터에 가지 못해서 지겨웠다. 그래도 이젠 엄마가 올 거니까, 다 괜찮다. 아이는 엄마의 생각에 방실방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낮에는 여름보다 더 덥더니, 해가 지니까 긴소매라는 사실이 하등 쓸모없을 정도로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오소소 닭살이 돋는 두 팔을 쓸어내리며 조금이라도 온기를 유지하려고 했다.
시계가 없으니 바늘이 11에 갔는지 아직 가려면 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정류장에 가서 엄마를 기다릴까? 그럼 살짝 술에 취해 정류장 벤치에 앉아 졸다가 다시 집을 향하던 아저씨가 있을 거고, 그 아저씨가 찬 손목시계를 볼 수 있어서 엄마가 언제 올지 가늠이라도 할 텐데. 엄마가 오지 말라고 했던 당부 때문에 아이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으며 고민하다가 그냥 가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엄마는 올 거니까.
아이는 점점 졸렸다. 꾸벅꾸벅 졸음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온 아이는 두 눈을 거칠게 비비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는지, 몇 번이나 큰 집 담벼락에 머리를 콩 찧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그 순간, 종일 열리지 않았던 큰 집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04. 나도 알아요. 내가 나쁜 아이라는 걸요.

 

아이가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놀라서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아이가 지내던 집이 아닌 게 분명했다. 아이가 지내는 집에는 침대가 없다. 침대를 놓을 공간도 없지만, 있다고 한들 그런 공간은 죄다 술병으로 채워졌을 테다. 그리고 아이의 집은 엄마의 정수리가 간신히 닿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낮았다. 그런데 지금 아이가 있는 곳의 천장은 아이가 힘껏 팔을 뻗어봤자 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게다가 지금 이 방은 아이의 집보다 배는 넓어 보였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이의 짧은 다리가 대롱대롱 흔들릴 정도로 침대도 너무 높았다. 힝. 힘들어. 아이는 작게 투정을 부렸다. 내려오기 위해서 손을 짚었더니 침대가 아이의 손을 따라 움푹 들어갔다. 그 감촉이 신기해서 아이는 내려오려는 걸 멈추고 몇 번이나 침대를 꾹꾹 눌러보았다. 몇 번 놀던 아이는 너무 푹신한 침대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아 다시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렸다. 얼마나 놀았을까. 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어쩌다가 밖이 아니라 침대 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집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자신은 집으로 가야 한다. 엄마가 기다릴 것이다. 엄마가 애타게 자신을 찾고 있을 거다.
아이의 커다란 두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보보야. 뛰지 말라니까!"
"형, 형아. 여기 빨리! 아가가 깨서 놀랐으면 어떡해!"
"형이 보기에는 안에 있는 아가나 너나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그리고 아가가 자고 있으면 어떡해. 보보가 시끄러워서 깨는 게 아닐까?"
"아니야! 보보 안, 시크러훠!"


갑자기 시끄러워진 바깥에 아이는 나가려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었다.
누구지? 여기는 왜 온 거지? 자신을 데리고 온 사람들인가? 납치범? 아이는 어디로 숨어야 할지 몰라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지만, 적당하게 숨을 수 있는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침대 위의 널브러져 있는 이불 안은 나아 보였다. 아이가 이불 속으로 쏙 숨자 조심스럽게 열린 방문 사이로 작은 아이 한 명과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학생 한 명이 들어왔다.


"형아! 아칙 아가 차나 봐하!"
"보보야. 속삭이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속삭이는 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차라리 목소리를 작게 하는 게 더 속삭이는 것 같이 보일 거야."
"보보는 속삭이는 거야! 그리고 보보 목소리 작아!"
"그래. 샤오보보. 아가가 아직도 자고 있나 봐. 그냥 저대로 자게 더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형. 형아는 전교 1등 한다는 거 거짓말이지? 아무리 아가라도 두 밤이나 계속 자는 건 이상해. 오늘이 지나면 세 밤째잖아. 아가 일어나야 해."
"샤오보보. 솔직히 말해 봐. 너 아가랑 놀려고 이러는 거지? 아가 괴롭히려고 하는 거면, 안 돼."
"형, 형! 이불이 파르르 떨려!"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계속 떠들기만 하자 아이는 점점 무서워졌다.
저 형이라는 사람과 보보라는 아이가 어서 나가야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집에 갈 수 있을 텐데. 아이는 두 눈을 꽉 감고, 두 귀를 막고서 어서 두 사람이 나가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아이의 기도는 효과가 없었는지, 아이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벗겨지면서 휑한 바람이 아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가, 깼어?"
"보보야! 미안해. 어,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저기, 괜찮아?"
"아가. 아가! 괜찮아?"



아이는 꽉 감고 있던 눈을 살포시 떴다. 그리고 아이의 눈앞에는 자신의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꽤 보드라워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큰 키와 덩치였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형이라고 불렀던 어른이 서 있었다.


"아가, 안녕?"
"샤오보보. 아가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어."
"하지만 아가 이름을 모르는걸?"
"그러면 물어봐야지. 샤오보보 이름을 먼저 알려주고, 물어보는 거야."
"응! 안녕? 나는 보보야. 나는 다섯 살이야! 너는?"
"나는 룬룬이야."
"아가, 몇 살?"
"샤오보보. 아가가 아니라 룬룬."
"룬룬! 몇 살?"
"다섯, 살."
"아가가 아니야? 왜 아니야?"
"그러니까 아가가. 어휴. 안녕 룬룬? 난 해관이라고 해.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 사실 네가 우리 집 앞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앉아있길래 걱정이 되어서 나가봤다가 네가 정신을 잃길래 여기로 데리고 왔어. 이제 괜찮아졌니?"


해관의 말에 아이는 두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쓰러졌다고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럼 엄마는 안 온 걸까? 아닌데, 엄마가 오기로 했는데, 엄마가 와서 함께 손잡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아이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해졌다.


"엄마, 엄마 기다렸는데."
"엄마를 기다렸니? 미안하지만, 네가 잠자는 동안 집 앞을 봤어도 너를 찾는 것 같은 여자는 본 적이 없어. 엄마는 언제 오기로 했니?"
"바늘이 11에 가면 와요."
"작은 바늘? 큰 바늘?"
"작은 바늘. 하늘에 별님이 콕콕 보이고, 바늘이 11에 가면 엄마가 와요."


아이의 말에 해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집 앞에서 쓰러진 아이를 데리고 온 시간은 밤 11시를 훌쩍 넘겨 새벽 2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해관이 집 담벼락 밑에서 홀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건 점심이 다가오는 늦은 오전이었다. 그때부터 아이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해관과 함께 아이를 발견한 보보가 아이에게 가서 함께 놀겠다고 떼를 써서 굉장히 곤란했었다. 어디에서 사는지도 모르는 아이를 함부로 데리고 올 수도 없기에, 아이의 엄마라도 지나가면 함께 놀아도 되겠냐고 부탁하자고 했다. 하지만 몇 시간을 지켜봐도 아이의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이웃들이 오가며 아이에게 주전부리를 주기도 했다. 아이는 그걸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걸 본 해관은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저녁이라도 먹여야 하나 고민했었지만, 또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엄마가 걸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그리고 늦은 저녁 퇴근한 삼촌이 담벼락 밑에 있는 아이에 관해 물었다. 해관은 반나절 동안 관찰한 아이에 대해 아는 대로 말했다.
삼촌은 혹시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냐고 말했고, 그제야 해관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가 그대로 있고, 어디를 가지도 않으니 지켜보자고 답했다.

보보를 재워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그 말은 밤 10시가 지났다는 소리다. 보보는 잠을 자기 싫다고 떼를 썼다. 밖에 있는 아가도 집에 가지 않고 잠을 자지 않는데, 자신이 왜 자야 하는 것이었다. 해관이 다시 담벼락 근처를 보니 아이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엄마를 기다릴까? 정말 엄마가 아이를 버린 걸까? 해관은 어릴 적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보보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고 말았다.
해관의 큰 소리에 보보는 깜짝 놀라 울음을 터트렸고, 삼촌이 나와 보보를 안아 들고 달래줘야 했다. 울다가 지친 보보는 잠자리에 들었고, 그 시간이 자정이었다. 형이 화를 낸 적이 없어서 보보가 충격을 받은 것 같다는 삼촌의 이야기에 해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해관의 시선은 여전히 담벼락 밑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있는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새벽 2시까지 잠들지 못한 해관은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아이의 몸이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마음대로 데리고 들어와서 미안해. 하지만 아직 밤은 추워서, 밖에서 잤다면 많이 아팠을 거야."
"아가! 보보랑 놀아!"
"아가가 아니라 룬룬."
"룬룬! 보보랑 놀아!"
"안 돼. 샤오보보. 룬룬은 아직 아파."
"아프지 않아요. 집에 갈 거예요."
"집이 어딘지 아니?"
"알, 아니. 몰라."
"모르는데 어떻게 가? 엄마 이름이나 핸드폰 번호, 집 전화번호라든가. 아, 그럼 아빠는?"
"아버지는, 안 돼요. 엄마는, 엄마는."


아이는 우물쭈물 답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가 모른다고 하라고 했는데, 엄마가. 해관은 아이가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에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이의 엄마는 대충 아이를 길거리에 버려두고 집에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시킨 거구나. 엄마라는 인간이. 까득. 해관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향해 원망을 퍼부었다.


"룬룬. 네가 모른다면, 엄마를 찾아줄 수도 없고, 집에 갈 수도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아니야! 엄마 올 거야!"
"룬룬 엄마는 언제 와?"
"바늘이 11에 가면 와!"
"룬룬은 시계 봐?"
"아직은 못 봐. 근데 엄마가 오는 건 알아."
"보보도 못 봐. 있잖아. 룬룬. 우리 놀자. 룬룬 엄마 오기 전까지 놀면 되는 거잖아. 아직 바늘이 11에 안 갔잖아. 그지, 형아?"


보보는 두 눈을 반짝이며 해관을 바라봤다.
그래, 아직 안 왔지. 평생 안 올 지도 모르는 인간이지. 해관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신이 데리고 들어와 버렸다. 삼촌은 네가 결정했으니 나쁜 일은 아니라고 해주었다. 대신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도와준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믿고 맡겨주는 삼촌 덕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도 일단 저지르고 본 걸지도 모른다.


"룬룬. 엄마가 오시기 전까지만 보보랑 놀아줄래? 보보가 친구가 없어서 많이 심심해하거든. 보보가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있어. 사이좋고 나눠서 가지고 놀면 안 될까? 보보도 친구한테 양보하면서 놀 수 있지?"
"응! 룬룬, 놀자! 보보가 재밌는 거 많이 알고 있어!"
"그러면, 엄마가 오기 전까지만 놀아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우리 그 전에. 룬룬 배고프지 않아?"


아이는 그제야 살살 아파져 오는 배가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의 얼굴은 금세 빨개졌고, 그 모습에 보보는 웃음을 터트렸다. 보보의 웃음소리 때문에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해관은 보보와 아이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고, 한 팔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룬룬. 먹고 싶은 거 있니? 형이 잘하지는 못해도, 다 만들어줄게."
"보보는 햄!"
"샤오보보가 룬룬 울렸으니까 안 돼. 룬룬이 먹고 싶은 거로 먹을 거야."
"칫! 그럼 룬룬, 햄 먹고 싶다고 해! 햄!"
"룬룬. 보보가 말하는 건 무시해도 돼. 뭐가 먹고 싶니?"
"나도 햄 먹고 싶어요."
"아싸!"


보보는 만세를 외치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해관은 재빨리 보보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아이가 안겨있지 않은 다른 팔로 보보를 안아 들었다. 해관의 품에 안긴 두 아이의 시선이 똑같아졌고, 보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이를 보면서 씩 웃었다. 아가. 작은 소리로 아이의 이름 대신 아가라고 부르는 보보에 아이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05.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를 보러 와줘요.

 

잠깐만 놀겠다는 아이, 룬룬은 벌써 보보와 일주일째 함께 놀고 있었다.


첫날에는 거실에서 놀면서 빤히 시계만 바라보다가 바늘이 11시가 되자마자 삼촌, 계인과 해관에게 배꼽 인사를 하고 보보에게는 작은 손을 열심히 흔들며 빠빠이를 한 뒤 담벼락으로 나갔다. 해관이 말릴 틈도 없이 룬룬은 후다닥 신발을 신고, 팔을 쭉 뻗어서야 간신히 닿은 문고리를 힘겹게 돌렸다. 차마 가지 말라고 말리지 못할 정도로 룬룬의 뒷모습이 애절해 보인 해관은 낑낑거리는 룬룬에게 다가가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룬룬은 다시 해관에게 감사하다며 배꼽 인사를 했다. 그에 해관은 무릎을 구부려 룬룬의 눈을 보면서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룬룬. 형이랑 같이 기다릴까? 밖이 너무 어두워서, 형이 걱정되어서 말이야. 그래도 괜찮을까?"
"보보도!"


룬룬은 눈을 또르르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괜찮을까. 오늘 종일 함께 있어 보니, 보보는 너무 잘 맞는 친구였고 해관은 친절한 형이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 들어온 보보의 삼촌은 아버지보다 더 좋은 냄새를 풍기는 따뜻한 어른이었다. 그러니까 괜찮겠지.
룬룬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의 뜻을 비쳤다. 보보는 해관의 뒤에서 만세를 외쳤고, 해관은 방방 뛰려는 보보를 달래며 겉옷을 가지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보보는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와 신발을 신기 위해 낑낑댔다. 멋들어진 로봇이 그려진 신발의 찍찍이를 대충 열고, 대충 발을 욱여넣고, 대충 찍찍이를 다시 붙이고는 벌떡 일어났다.


"완료. 출동 준비 끝!"
"샤오보보. 뭐가 출동 준비 끝이야. 신발은 제대로 신어야 한다고 했잖아. 룬룬을 봐. 혼자서도 뒤꿈치를 구부리지도 않고, 제대로 신었잖아."
"룬룬은 똑똑해서 그래!"
"샤오보보도 똑똑하면 되겠네."
"이이. 형아 바보야!"
"그래. 형아가 바보네. 샤오보보, 이거 입자. 오른쪽 팔 줘."
"형아, 바보야? 꺄핫."
"그리고 왼쪽."


오른쪽, 왼쪽. 해관의 말에 따라 척척 손을 들어 올리는 보보를 보며 룬룬은 갑자기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손이 어디였지? 왼쪽은?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드니 보보의 한쪽 손이 번쩍 들렸다. 그 모습에 룬룬은 왼쪽 손을 간신히 주먹을 쥐며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을 구별할 수 있었다.


"룬룬도 이리로 와 볼래?"
"보보랑 같은 옷이야!"
"그래. 샤오보보랑 똑같은 옷이네. 룬룬, 괜찮지?"


싫다고 하면 다른 옷을 줄 건가?
하지만 룬룬의 눈에도 꽤 값비싸 보이는 겉옷이었기에 룬룬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해관은 씩 웃으며 룬룬의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옷을 입혀주었다. 오른쪽 팔, 왼쪽 팔. 장난꾸러기 보보에게 대하는 태도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행동에도 룬룬의 몸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해관은 그저 엄마를 생각하느라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해관의 오른쪽에는 보보가, 왼쪽에는 룬룬이 해관의 손에 잡혀 담벼락 밑으로 나갔다.
보보는 밤 11시면 자야 한다던 삼촌과 해관의 잔소리가 없는 지금이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집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으니 큰 소리로 떠들면 안 된다는 해관의 당부에 보보는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이 시간에 나온 것 자체가 처음이라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룬룬은 담벼락으로 나오자마자 엄마와 약속했던 그곳으로 가 쪼그려 앉았다. 그 모습에 보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쪼르르 다가가 함께 쭈그려 앉았다. 왜 앉았냐는 질문도, 너는 앉지말라는 핀잔도 없었다. 보보와 룬룬은 짧은 다리로 쭈구려 앉은 채 서로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생각에 목소리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동시에 작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해관은 현관문 앞에 서서 보보와 룬룬을 지켜봤다.
그리고 적당한 때를 봐서 둘을 데리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날까지 룬룬은 밤 11시가 되면, 담벼락으로 나갔다.
심지어 셋째 날에는 계인과 해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밤 10시부터 우두커니 서서 시계만 바라보다가 11시에 바늘이 멈추자마자 곧바로 신발에 발을 욱여넣고, 밖으로 나갔다. 함께 놀고 있던 보보는 후다닥 움직이는 룬룬을 멍청한 표정으로 그저 보기만 했고, 해관조차 룬룬을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철로 된 커다란 대문은 룬룬에게 버거운 상대였다. 집 현관문까지는 열었다 싶더니, 담벼락 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문이 더 남아있었다. 그동안 해관이 열어줘서 몰랐는데, 눈앞의 대문은 너무 단단했고, 차가웠다. 룬룬이 대문을 열기 위해 손을 댔다가 재빨리 떼야만 할 정도로,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무서웠다.
해관이 대충 슬리퍼를 신고서 마당으로 나오자 대문 앞에서 쭈그려 울고 있는 룬룬이 보였다.

그날 룬룬은 담벼락 밑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어스름하게 새벽 동이 뜰 때까지 해관의 품에서 보보와 함께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룬룬은 다시는 울지 않았다.
룬룬이 보보와 함께 놀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된 지금, 룬룬은 밖으로 나가겠다는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보보가 심심하다며 붕붕이를 타고 싶다 하여 마당을 나간 적은 있지만, 룬룬은 대문으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딱 마당의 절반 정도까지만 걸어가다가 다시 뒤돌아섰다.

보보는 룬룬과 함께 있는 덕분에 편식이 줄어들었다. 여전히 당근은 먹지 못하지만, 미끄덩거린다고 던지던 가지와 버섯은 우거지상이긴 해도 어떻게든 씹고 넘기긴 했다. 보보가 힘겹게 꿀꺽 넘기면, 옆에서 룬룬이 짝짝 손뼉 치면서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해관이 역시 샤오보보는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는 환상의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다행히 룬룬은 편식을 하지 않았다. 주는 대로 먹었고, 주는 만큼 먹었다. 그 덕분에 고작 일주일이 지난 지금, 보보에 비해 홀쭉했던 볼이 보보만큼 오동통해져 한층 더 귀여워졌다. 그래서 보보와 룬룬을 돌보던 해관은 귀염사가 이런 것이라는 걸 착실히 배우고 있었다. 오늘 남해관 사인은 귀염사. 나의 죽음을 적에게 널리 알리라! 핸드폰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 보보와 룬룬을 찍으며 해관은 속으로 주접을 부렸다.

룬룬은 가끔 창밖을 볼 때가 있었다.
그 창밖에는 높은 담벼락이 보였고, 그 너머에 사람과 차가 오가는 넓은 길이 보였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낮에는 보보와 노느라 보지 않았고, 주황색 노을이 지는 시간에는 계인에게 달려가 배꼽 인사를 하느라 보지 않았지만, 예쁜 별님이 콕콕 하늘에 박히고 시곗바늘이 11을 가리키는 시간이 되면, 룬룬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을 창 너머를 보다가 다시 보보에게 달려갔다.


"보보야. 코해. 코오 해요."
"룬룬. 코오 해야 해?"
"응. 룬룬은 코오 할 거야. 보보는 안 할 거야?"
"보보는 아직 싫어. 안 할 거야."
"그래. 그럼 룬룬만 코오 할 거니까, 보보는 더 놀아. 안녕."


룬룬은 보보에게 손을 흔든 뒤, 서재에서 책을 읽는 계인에게 다가가 '안녕히 주무세요.'라며 배꼽 인사를 하고, 해관에게 다가가 '형아. 안녕히 주무세요.'라며 배꼽 인사를 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룬룬이 해관에게 인사하는 모습까지 보던 보보는 손에 쥐고 있던 장난감을 한 번, 2층으로 사라지는 룬룬을 다시 한번 본 뒤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팽개치고서 룬룬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보보가 던져버린 장난감을 정리하는 건 해관의 몫이었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보보의 뒤통수를 향해 인사를 하지 않을 거냐고 고함을 치는 건 계인의 몫이었다. 하지만 둘에게 보보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장난감은 형아가, 인사는 룬룬에게 받지 않았는가.
보보는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에 눕지 않고, 룬룬이 누워있는 침대로 가서 룬룬의 옆에 누웠다.


"좁아."
"보보가 누우면 좁아?"
"음. 그럼 룬룬이 이렇게 옆으로 더 가면 안 좁아."
"그럼 보보도 이렇게 옆으로 누우면 안 좁다?"
"룬룬도 그렇게 누울까?"
"우리 얼굴 보면서 자자."
"그럴까?"
"손도 잡아."
"응. 좋아."
"먼저 일어나도, 손 놓지 마. 룬룬."
"그래. 놓지 말자."


보보와 룬룬은 서로의 작은 손을 꼭 그러쥐었다.
너는 놓으면 안 돼. 잠들기 직전까지 서로에게 먼저 놓지 말라는 말만 중얼거리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눈이 감겼다. 생각보다 조용한 2층에 해관이 보보와 룬룬을 살펴보기 위해 올라왔다. 불도 끄지 않고 룬룬의 침대에서 서로의 손을 꼭 쥐고서 새우잠을 자는 두 아이를 보며 해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충 덮어진 이불을 다시 제대로 덮어주고 뒤돌아 방을 나오며 불을 끄려던 손을 다시 걷었다.



보보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잠을 자지 못한다.

 

 

 

이보등륜

 

//
굉장히 오래전에 올렸던 건데 갑자기 생각나서 재업함
이제와보니 개연성은 쓰레기 통에 버렸었네 ㅋㅋ
자잘한 오타가 있던 건 발견하고서 고치긴 했지만,
읽다가 발견하면 제발 알려주세오.


code: [ffc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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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code: [2760b] - 2024/07/03 00:25

헐 난 첨봐여 센세 미친 어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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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ce3b3] - 2024/07/03 02:12

내센세오심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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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7f7d1] - 2024/07/21 01:11

마이센세 입갤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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