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 이보등륜, Cosmic Boy 02

https://sngall.com/articles/883
2020/11/12 22:59
조회수: 147

이 또한 일종의 사건이었으나 제가 피해자 편에 서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최대한 제3의 입장에서 지켜보려고 해도 소리도 없이 눈물만 흘리던 얼굴이 아른거려 주먹만 세게 쥐는 게 전부였다. 어찌나 세게 쥔 건지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져 보니 손톱이 박혀 피가 맺혀 있었다. 주먹이라도 나갈까 이보는 무릎에 손을 말아 올린 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새끼가 먼저 이상한 말을 해서 제 선발을 망쳤다구요.”
   “너한테 안 물었어. 어떻게 된 겁니까, 선생님.”


   서늘한 이보의 눈빛에 가해 학생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선생은 가운데 자리에 앉아 두 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차분히 말했다. 


   “등륜 학생이 가해 학생에게 오늘 어떤 일을 조심하라고 언질을 주었고, 가해 학생은 그걸 신경 안 쓰고 일을 진행했다고 해요. 가해 학생은 부상을 입었고, 등륜 학생의 말이 떠올라서 너 때문이라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언어나 신체적으로 직접적인 폭력은 없었단 말씀이네요. 먼저 저쪽에서 주먹 휘두른 거구요. 법적으로 처리할 테니까 이번 일은 묵인 안 하겠….”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이보는 제 셔츠 소매 끝을 당기는 조심스런 손길에 말을 멈췄다. 눈이 퉁퉁 부어서 저를 보는 소년이 보인다. 이보는 입 모양으로 왜냐고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은 채 말이 없다. 형사적인 감은 참으로 특이한 곳에서 발휘된다. 이보는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소년에게 속삭였다. 

  
   “이번 일 넘어가면 또 반복될 거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쪽은 신경 안 써도 돼요.”


   선을 긋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저런 태도를 취했던가 묘하게 기시감이 일어 이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사법기관은 사건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 등륜의 뜻이 완고해 보였기에 이보가 더 이상 말을 할 이유도 없다. 이보의 소매 끝을 놓지 않고 등륜이 조곤조곤 말했다. 


   “사과랑 치료비만 받고 넘어갈게요.”


   육상부 에이스로 불릴 만큼 유망한 아이다. 등륜의 말에 가해 학생 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치료비 부분이라면 발생한 만큼 청구해주세요. 너도 미안하다고 사과해.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던 학생은 아버지의 서슬 퍼런 기색에 때려서 미안,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됐어요. 등륜이 먼저 일어나 상담실 밖을 나갔다. 이보도 따라 나가려던 찰나 가해 학생 아버지는 이보를 붙잡아 명함을 내밀었다.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주세요. 네, 저도 문제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마 경찰서 쪽에서 연락할지도 모르겠네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기어코 못 참고 비딱하게 말한 이보는 명함을 낚아채듯 쥐고 상담실 밖을 나갔다. 


   “잠시만요, 보호자님.”


   빠른 보폭으로 걸어가던 이보의 뒤를 선생이 따라왔다. 상담실을 나온 순간부터 쫓아온 건지 숨이 거칠다. 이보는 삐딱하게 서서 그를 보았다. 


   “등륜 학생 얼마 전에도 다칠 뻔한 적이 있어요. 체육 선생님이 발견하셔서 미수로 끝났구요. 그전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이상한 아이라고 말이 돌았나 봐요. 저도 계속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미리 전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들어가세요.”
   “네,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세요.”


   가볍게 거수 경례를 한 이보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아까 절뚝거리던 것 같은데 대체 어딜 간 건지 모르겠다. 이 놈의 학교는 왜 이리 넓은 거람. 계절이 계절인데도 열이 나서, 걸쳐 입은 가디건을 거칠게 벗어 어깨에 걸쳤다. 휘적휘적 교정을 걷던 이보는 멀지 않은 스탠드 구석에 앉아 있는 등륜을 발견하고 걸어갔다. 
   다리가 아픈 건지 등륜은 손으로 그 부분을 눌렀다. 조금만 건드려도 통증이 느껴져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인기척이 느껴져도 고개를 들지 않은 건 일종의 아집이었다. 괜찮아? 그럼 그쪽같으면 이게 괜찮겠나요, 라고 다정한 물음에 삐딱하게 대답할 뻔했다. 등륜은 그의 얼굴을 스치듯 한번 보고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건을 왜 거기서 마무리 지은 건지 물어봐도 돼?”


   오는 길에 자판기에서 사온 이온음료 캔 하나를 소년 쪽으로 밀었다. 그것을 손에 쥔 채 소년은 스니커즈 앞코로 바닥만 긁는다. 화가 난 건지 우는 건지 얼굴을 안 보여주니 당최 알 수가 없다. 수많은 사건을 맡았으나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이보는 무얼 해도 소년에게 상처를 줄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지면을 긁던 등륜은 제 다리 사이로 삼삼오오 지나가는 개미 무리를 보았다. 일렬로 나란히 줄을 맞춰 묵묵히 기어간다. 마치 제 신세 같아서 등륜은 메마르게 웃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더라. 다른 사람의 손길은 여전히 무섭고 낯설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 손길이 차라리 싫으면 거부하면 그만인데, 저 손길은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삐뚤어진 마음은 점점 기울어져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보호소로 보내질 거, 형사님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서요.”


   애초부터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조난선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구조되어 제 의사와 상관없이 짐짝처럼 여기 맡겨졌다. 보호실에 있는 동안 보호소를 알아봐 달라 소리치던 이보의 말이 맴돌았다. 학교를 보내달라고 한 건 용기를 긁어모아 겨우 말한 것이었다.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던 것이기에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리 한 것이었으나 어째 시작부터 개판이었다. 
   울 기운도 없어 등륜은 쓰게 웃었다.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신은 믿어주려나. 아마 선생에게 나에 대한 것은 대충 전달은 받았을 거다. 보호소에 보내지 말아달라, 여기 있고 싶다. 그 말이 목구멍에서 막혀 맴돌기만 한다. 보호 시설 결과는 언제 나오냐 길길이 날뛰는 사람에게 그 말을 해봤자 소 귀에 경 읽기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말이 없던 이보가 몸을 일으켜 등륜 앞에 등을 내밀었다. 업혀. 눈을 깜빡거리던 등륜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화낼 자격조차 없기에 이보는 달래듯 등륜에게 말한다. 


   “그 다리로 걷는 것도 힘들잖아. 업혀. 병원 데려다줄게. 오늘 반차 써서 서로 복귀 안 해도 돼.”
   “걸을 수 있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한 번만 따라주라, 평생 걷기 싫으면 고집부려, 계속.”


   쓸데없는 고집으로 인생을 망친 케이스는 경찰학교 시절부터 수도 없이 봤다. 이보는 왜 내가 이런 말까지 해가며 저 소년을 설득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갔다. 네가 뭔데 나를 신경 쓰이게 해. 먼저 거리를 둔 건 이보였다. 언젠가 헤어질 사이라 먼저 선을 그어 소년을 이 지경으로 몰았다. 백 번 사과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이보의 등을 멀거니 보던 등륜은 눈알을 굴렸다. 이 등에 업히는 건 쉬우나 일이 끝나면 당신은 나를 보호소로 보내겠지. 어차피 정해진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으니 그대로 따라가면 그만이다. 등륜은 팔을 뻗어 이보의 등에 업혔다. 
   미쳤냐. 샹콩은 머쓱한 표정의 이보를 보며 말했다. 형사님, 대체 애를 어떻게 놔뒀기에 저 지경이 돼서 왔습니까 이 미친 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형사냐 국민 제대로 안 지켜? 그러면 나도 형사하겠다, 이 썅놈 새끼야, 라는 의미를 전부 함축한 말이었다. 콧잔등을 검지로 살짝 긁으며 샹콩은 등륜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준 뒤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말 그대로 접질렀어요. 깁스하면 될 것 같아요. 그 외에는 뭐 가벼운 타박상이니까 이 무능한 형사랑 같이 내원해서 증상 지켜보는 게 좋겠네요.”
   “나한테도 그렇게 친절하게 말해주면 안 되냐.”
   “환자랑 친구랑 같냐, 또라이야.”


   경찰청 연계 병원으로 왔다길래 놀라서 한달음에 진료를 맡았더니 환자는 이보가 아니라 등륜이라는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몇 개월 동안 우주를 부유하던 조난선의 유일한 생존자라 한동안 센터 내에서는 화제였다. 소문대로 하얀 얼굴에 표정이 없다. 이렇게 보니 왕이보가 한 명 더 앉아 있는 기분이다. 


   “진단서는 끊어줄 테니까 받아가. 치료비 청구한다며.”
   “어, 그렇게 됐네.”
   “원무과에서 받아가. 깁스는 처치실 가서 받으면 돼.”
   “고맙다.”
   “내가 미쳤나. 살다살다 왕이보 입에서 고맙다는 소리를 다 듣네. 얼른 가기나 해.”


   키보드를 두들기던 샹콩이 손을 휘젓는다. 이보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등륜은 먼저 일어나 절뚝이는 걸음으로 걷는다. 나중에 술 사줄게. 진료실 문을 닫기 전 복도가 떠나가라 외친 이보가 다급하게 소년의 뒤를 따라 달렸다. 
   처치실에서 깁스를 한 후 잠시 기다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소년이 사라졌다. 원무과에서 수납을 하고 온 이보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다. 몇 개월 동안 홀로 부서진 우주선에서 표류했다고 들었다. 광활한 우주는 온통 까만색 범벅이다. 홀로 버텼을 걸 생각하면 신경이 쓰이고도 남았다. 이미 그은 선을 한참 전에 넘었다. 소년의 일에 제가 나섰다는 것만으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보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병원 각 층을 돌아다녔다. 
   깁스한 학생이요? 아까 옥상 정원으로 갔어요. 간호사의 말에 이보는 냉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원함을 머금은 바람이 머리를 휘젓는다. 노을이 잘게 퍼지는 풍경 속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마른 뒷모습이 보인다. 이제보니 소년의 교복은 온통 흙과 핏자국으로 엉망이다. 저는 어지간히 무신경하다. 이보는 쓰게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말 좀 하고 사라져주면 안 될까.”
   “그쪽도 말 안 하고 보호소 보내려고 했잖아.”
   “말이 짧다?”
   “두 살 차이가 뭔 대수에요? 나랑 수준은 비슷한 것 같은데.”


   가시가 잔뜩 돋힌 말에 이보는 발끈해서 대답한다. 등륜은 입꼬리를 올려 웃은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손에는 이보가 사준 음료캔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선생이 내가 이상한 애라고 소문난 거 말했죠?”
   “어, 대충은.”
   “미래는 안 바뀐다니까. 그쪽도 내가 이상한 애라고 생각해요?”
   “널 모르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줄까.”
   “하긴 남보다 못하지….”


   저보다 반 뼘은 더 큰 주제에 따박따박 말대꾸다. 어째 제가 팀장에게 대하던 그것과 닮아있어 이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팀장도 이렇게 속이 뒤집혀 졌을까. 미운 짓은 골라 하면서 나쁜 말이 안 나온다. 이보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려다가 손을 멈췄다. 


   “형사님.”
   “왜.”
   “내가 미래를 본다고 하면 믿어요?”


   담배를 입에 물고 이보가 눈을 깜빡인다. 미래를 본다? 멸망한 지구에서 도망쳐 새로운 행성에 정착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인데, 뭐 그 정도야. 이보는 아무런 대꾸도 안 하고 등륜의 손에서 캔을 뺏어 따주었다. 마시지도 않고 왜 계속 들고 다니나 무심히 지켜봤더니 따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었다. 의외의 면이다 싶어 이보는 옅게 웃었다. 


   “응, 믿어.”


   저 노을빛을 불꽃이라고 생각하면 불이 붙을까. 이보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빙글빙글 돌렸다. 등륜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할 말을 찾고 있는 듯했다. 큰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이 곧장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이보는 푸스스 웃었다. 


   “어릴 때 너랑 비슷한 친구를 본 적 있거든. 너처럼 자기 능력을 믿냐고 물었고, 나는 그때도 믿었어.”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요?”
   “만나지 못하는 행성으로 갔어. 아마 저기 어디쯤에서 반짝이고 있을걸.”


   이보는 손가락으로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완전히 어둠이 찾아오기 전이라 잔잔하게 노을빛이 퍼지는 하늘에 별은 희미했다. 등륜은 이보가 따준 음료수를 들이켰다. 부정의 말을 기대하고 던진 말에 긍정으로 받아칠 줄은 몰라서 할 말을 못 찾았다. 제가 본 미래와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너 보호소 안 보내. 계속 여기 있어도 돼.”
   “정말요?”
   “생각해봤는데 그 편이 너한테 나을 거 같아서. 그렇다고 내가 잘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 최선은 다 할게.”


   말이라도 좀 곱게 해주면 안 되나. 등륜은 눈을 가늘게 떴으나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타인에게 제 능력에 대해 말해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소년은 충분했다. 
   결국 담배는 피지 못했다. 이보는 그것을 고이 담배갑 안에 다시 넣었다. 이참에 금연이나 할까 잠시 고민했다. 객식구가 하나 늘었으니 우선은 담배와 술부터 줄이는 편이 좋겠다. 각오를 다지니 머리가 개운하다. 이보는 손을 뻗어 등륜이 일어서는 것을 도와준 후 무심하게 같이 걸었다. 


   “집 근처에 스테이크 맛있게 하는 곳이 있어. 먹고 갈까?”
   “스테이크 말고 다른 건요?”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그럼.”


   잠시 고민을 하던 등륜은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그것을 대었다. 계란이랑 햄,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요. 커피도 궁금해요. 저 말을 얼마나 참은 건지 한 번 말을 시작하니 종알종알 끝이 없다. 그럼 샌드위치랑 커피 사서 집에 가자. 절뚝거리는 걸음이 느려 등륜이 미안하다고 말을 하기 전에 이보는 천천히 발을 맞춰 걸었다. 


code: [89314]
목록 Gift

댓글

code: [1f6e9] - 2020/11/12 23:03
진짜 최고야.....센세...어나더....
-
- perma_link - 삭제 - gift
code: [71e95] - 2020/11/12 23:05
뻥안치고 ㄹㅇ 내붕생무순임 센세ㅠㅠ 어나더억나더ㅠㅠ
-
- perma_link - 삭제 - gift
code: [4c0d8] - 2020/11/12 23:05
하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존좋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분위기 최고햐
-
- perma_link - 삭제 - gift
code: [323a2] - 2020/11/12 23:12
으아ㅠㅠㅠㅠㅠㅠ이거는 진짜 존나 사랑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 perma_link - 삭제 - gift
code: [323a2] - 2020/11/12 23:13
진짜 재탕까지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새롭다ㅠㅠㅠㅠㅠㅠ
-
- perma_link - 삭제 - gift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