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 이보등륜,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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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2 21:43
조회수: 608

그 해 여름 내 사랑은
짙은 안개 속처럼 
참 난감해서 더 절절했다. 

이제야 하는 얘기다. 

- 오인태, 난감한 사랑









 

   0. 

 

   메마른 풀이 등을 간지럽히고, 청량한 여름내를 머금은 바람이 귀를 스쳤다. 얇은 교복 셔츠 사이로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져 소년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고 말았다. 팔을 머리 아래로 넣은 채 눈을 감았다. 소년의 까만 눈 사이로 파란 우주가 가득 들어찬다. 풀밭에 드러누운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교복 셔츠가 눅눅해지는 느낌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년을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왕이보 찾았어요? 저쪽으로 간 거 봤어요. 레슨 선생의 성질난 목소리에 이보가 눈을 뜬다. 허공 위로 팔을 뻗어, 손 틈 사이로 잘게 부서지는 구름 조각 개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숫자가 올라갈수록 저를 찾는 선생의 목소리도 높아진다. 운동장에서는 육상부가 훈련 중인 듯,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커졌다가 작아지는 소리에 이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온전히 소년 만의 세계였다. 멍멍하게 울리는 소리 속에서 소년은 저를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찾았다.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오렌지빛에 소년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무더운 여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붙잡은 채 그가 환하게 웃어주고 있다. 어느 봄의 끝이었다. 








   1.


   최근 들어 청력이 나빠졌다. 레슨 선생인 이령은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소년을 재촉해도, 가수가 될 게 아닌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심드렁하게 대답해서, 이령의 속을 더 뒤집어 놓았다. 제법 화가 난 이령은 레슨이고 뭐고 전부 때려치우고 레슨실을 나갔다. 뭐가 어때서. 괜한 참견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솔직히 왜 제가 피아노를 붙들고 있는지 몰랐다. 이령은 이보의 천재성을 일찍 발견했다. 단지 이보만 그것을 모를 뿐이었다. 
   학생들이 하교를 끝낸 후의 학교는 고요했다. 이보는 3층으로 올라가, 낡은 음악실의 문을 열었다. 건조한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가방을 교탁 위에 던진 후, 피아노 뚜껑을 열어 음 하나를 눌렀다. 최근 조율을 한 건지 평소에 나던 둔탁한 소리가 아닌, 맑은 소리가 울렸다. 가방에서 악보집을 꺼내어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이틀 전에 초견에 들어간 곡이었다. 꽤 복잡한 기교가 들어간, 별로 끌리지 않는 곡이었다. 몇 번 건반을 두들기던 이보는 거칠게 뚜껑을 닫았다. 
   너 집에 안 갔어? 노크 소리와 함께 등륜이 웃는 낯으로 소년을 보고 있다. 이제 가려구요. 무심한 목소리로 이보가 말했다. 방금 친 곡 좋았어. 샤콘느 맞지. 등륜은 어깨에 맨 바이올린 가방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엄청 매력적인 곡이야. 눈을 예쁘게 접어가며 웃는데, 이보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아니고,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어. 너는 항상 여기에 있어서 말야.”
   “뭔데요, 선배.”
   “내 연주회에 반주해 줄 수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이보는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독주회가 언젠데요. 8월 초 전후. 아직 공연장 컨택 중이야. 그때 즈음이면 방학이니 레슨 일정은 조율하면 그만이다. 알았어요. 대신 맛있는 거 사줘요, 선배. 이보가 말하자 등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대할게. 그때 봐. 손을 팔랑이며 음악실을 나간다. 대충 걸친 교복 셔츠가 바람에 팔랑이는 기분. 이보는 악보집을 손에 꾹 쥔 채 참았던 숨을 쉬었다. 소리가 잘 안 들린다는 건 생각보다 좋지 않은 일이었다. 소년은 조금 더 그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싶었다. 
   이보에게 모든 것은 무의미했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물의 반짝임도, 맑게 펼쳐진 하늘도, 건조하게 변해가는 바람의 흐름도,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시계의 째깍거림도. 하나같이 단편적이고 메마른 것들이었다. 일상이 변하기만을 바란 적은 없다. 늘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레슨을 빼먹고 풀밭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3일 내내 들어온 문자라곤, 제게 반주를 부탁한 등륜 뿐이었다.


   「샤콘느가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고 누가 그러더라. 이보 네가 연주하는 샤콘느는 낭만적이었어- 룬거」
   「답장 안 해도 돼. 그냥 나는 말하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어. 난 항상 혼자거든. 그래서 독주회를 정했을 때 피아노 반주를 해줄 상대가 너 밖에 안 떠올랐어. 내 세상은 전부 너야-룬거」
   「오늘 점심은 늦어서 샌드위치. 이보 너는 점심 먹었어? 소리 잘 안 들린다고 네 친구가 그러던데 꼭 병원 가보는 거 추천해. 내 독주회에서 네가 빛났으면 좋겠어-룬거」
   「보보 너는 감정에 서툰 것 같아. 샤콘느에 담긴 네 감정은 낭만적이지만, 연주라는 게 반주자가 어떤 감정을 담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져. 너의 마음은 지금 어때? 나는 네가 내 반주를 해준다는 것만으로 행복해-룬거」
   「비가 흠뻑 내린 뒤 땅은 금방 굳어져. 너는 지금 흠뻑 비를 맞는 중이라고 생각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 너만의 샤콘느가 완성해길 바라. 독주회에서 연주할 곡 악보는 메일로 보내줄게. 오늘도 내 계절은 맑음이야-룬거」


   소년은 무료함에 읽던 톡창을 내린 후 메일을 열었다. 등륜이 보내온 메일에 악보가 한가득이었다. 소년이라면 듣는 순간부터 이미 모든 악보를 외웠을 것이다. 소리가 희미해지는 지금, 아무 의미도 없었으나 소년은 등륜이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맴돌아서 사르르 입꼬리를 올렸다. 







   2.


   슬픔과 낭만을 동시에 연주하는 소년. 남쪽 끝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우연히 마을로 봉사를 온 이령을 만났다. 반 장난식으로 보여준 피아노 연주에 이보는 한 번 듣고 악보도 없이 그것을 전부 외워 그대로 쳤다. 이령의 연주보다 조금 더 마음이 아린 그것에 이령은 이보의 부모에게 상황을 전했다. 제대로 가르쳐보고 싶다는 이령의 제안에 이보의 어머니는 찬성했으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이것을 그냥 두기에는 소년의 반짝일 미래가 안타까워 이령은 문턱이 닳도록 이보의 집을 방문했다. 이보의 아버지 뜻은 단호했고, 피아노의 매력에 잔뜩 매료된 이보는 그에게 크게 화를 낸 후 짐을 챙겨 이령을 따라 도시로 올라왔다. 
   피아노에 대한 소년의 잠재력은 바다와 같이 깊었다. 소년의 첫 독주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언론 메인을 잔뜩 장식한 소년은, 슬픔과 낭만을 연주하는 소년이란 별명과 함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소년의 연주에 감명한 저명한 익명의 독지가가 소년을 후원해준 덕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만큼은 소년은 자유로웠다. 음악 속에서 물 만난 물고기는 쉴 틈 없이 헤엄쳐 깊은 바다 속을 노닌다. 감정에 서툰 소년은 음악에서 모든 것을 찾았다. 시설이 낡아 아무도 찾지 않는 3층 음악실은 소년 만의 세상이라, 아이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간 오후면 그곳은 소년이 독차지했다. 바다를 노니는 물고기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한창 연주를 끝낸 이보가 눈을 뜨니 박수 소리와 함께 예쁜 반달을 그리는 하얀 얼굴의 그가 있었다.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 제일 낭만적이었어. 그쪽이 낭만을 알아요? 반문하려다가 입을 꾹 다문다. 마음대로 들어서 미안해. 지나가다가 연주가 너무 멋져서 나도 모르게 들었어. 나는 바이올린 전공하는 등륜이라고 해. 너는 왕이보 맞지? 이야기 들은 적 있어. 악수를 청하는 손에 밴드가 잔뜩이다. 이보는 옅게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소년의 세상에 등륜이라는 이름의 수채화가 색을 머금고는 진득하게 퍼졌다. 감정 표현에 서툰 소년은 그를 마주하면 얼굴이 붉어져 눈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소년의 연주를 들을 때면 감정은 조금 더 격해져 건반을 누르는 손끝이 세졌다. 어느 부분에서는 감미롭게, 어느 부분에서는 세게. 이령의 잔소리가 귀를 맴돌아도 소년은 오로지 제 감정에 집중했다. 모든 것이 끝날 때 그가 쳐주는 박수 소리는 하나의 햇살같아서, 소년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 연주하고 싶었다. 


   「너 오늘 레슨 빼먹었지? 이령 선생이 화내면서 너 찾고 있어. 얼른 레슨 가-룬거」


   얼마나 교내를 뒤졌으면 등륜마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안 들어갈 건데. 입술을 비죽이며 이보가 답장을 보냈다. 
   찌익거리는 이명에 소년이 몸을 웅크렸다. 고요한 세계에 섞이는 이명이 귀를 아프게 해서 소년은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모든 건 찰나의 순간이니 지나가면 그만이다. 조금 나아진 통증에 소년은 웅크린 폼을 풀었다. 갑작스레 웅크린 탓에 어깨가 쑤시는 느낌이었다. 


   “너 그거 존나 심각한데 치료로 안 될 것 같은데.”


   준이 퉁명스레 말한다. 이보가 증상 몇 가지를 던지자 대답을 해온다. 누가 의사 아들 아니랄까봐.


   “병원 가, 당장. 등륜 선배 반주 해준다며. 몇 주 남았다고 개겨.”
   “죽어도 안 가. 피아노고 나발이고 때려치울 거야.”
   “그럼 반주는 왜 해준다고 한 건데. 미친 놈.”


   당최 이해가 안 돼서 준은 고개를 저었다. 거, 입버릇하곤. 이보가 혀를 차는 소리에 준은 어이가 없어 눈을 흘겼다. 사돈 남말 하고 있네. 입으로 도록도록 사탕을 굴리던 이보가 준을 빤히 본다. 제 입모양을 보는 듯 했다. 


   “너 뭐라 그랬냐.”
   “이게 안 들려?”
   “작게 말하는 소리는 거의 안 들려.”
   “당장 병원 가! 아예 모든 소리 안 들을려고 작정했냐?”


   고래고래 준이 이보에게 소리쳤다. 유일한 친구가 제게 말한다. 조용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고 했던가. 서슬 퍼런 기색에 이보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주고는 고개를 팔에 묻어버렸다.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이었기에 이 잔소리도 곧 끝날 것이다. 


   넌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에 서툴 뿐이야. 


   이보의 연주에 즉석으로 연주를 하던 등륜이 말했다.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린 이보가 불퉁한 얼굴로 건반을 살짝 눌렀다. 건반을 누를 때면 제 마음도 눌러지는 기분이라 그런 지도 몰랐다. 
   네가 연주하는 피아노 듣고 싶어. 바이올린을 교탁 위에 내려두고 등륜이 턱을 괸 채 말했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고르던 이보는 머릿 속을 떠도는 음표를 모아 정리했다. 치고 싶은 음이 가득이라 곡은 금방 충만해졌다. 허밍으로 음을 새기던 등륜은 저까지 행복해지는 연주에 소년을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소년은 달력에 붉은 색연필로 칠해둔 날짜를 보았다. 독주회 전 등륜과 만나기로 한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입술을 가볍게 문 소년은 지갑을 챙겨 기숙사를 나섰다. 등 뒤로 뜨거운 여름 햇살이 꽂혔다. 






   3.


   시간을 되돌려 소설 책의 어느 귀퉁이 즈음. 

   거리가 어둑해져 잘게 부서지던 오렌지빛이 금방 희미해졌다. 맑은 강 위로 어둠이 금세 퍼지고, 그 위를 스치는 지하철 소음이 웅웅거린다. 강둑을 뛰어놀던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길가에 곱게 놓인 가로등에 불빛이 켜졌다. 요리 재료가 다 떨어져 장을 본 후 돌아오던 등륜의 발걸음이 멈췄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커다란 거즈를 한쪽 귀에 붙인 소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봉투를 땅에 내려놓은 채 등륜이 소년을 깨웠다. 


   “이보야, 여기서 뭐해.”
   “선배.”


   잠기운이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보더니 헤실헤실 웃는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 꼴이람. 등륜은 소년을 일으켜 세운 후 집 문을 열었다. 안 들어갈 거야? 눈을 깜빡이는 소년에게 등륜이 무심하게 물었다. 고갯짓에 소년이 환한 낯으로 저를 따른다. 
   저녁거리가 다 떨어져서 장 보고 오는 길이야. 너도 같이 먹자. 등륜이 냉장고에 재료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멀거니 서 있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륜의 곁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는다. 


   “선배.”
   “응.”
   “감정이란 게 뭐에요?”


   이보가 대파 뿌리 끝을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소년의 물음에 등륜은 눈을 깜빡였다. 소년이 어떤 환경인지 알았기에 등륜은 작게 웃으며 거실 소파 위에 던져둔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쳤다. 소년의 눈을 마주하는 눈이 참으로 반짝거려서 이보는 대파를 품에 안은 채 등륜의 손끝을 보았다. 
   집안 가득 가느다란 선율이 들어찬다. 눈을 감은 채 이보는 그 연주를 들었다. 무더운 여름날 음악실에서 듣던 것과는 또 다른 소리였다. 어딘가 저릿하면서도 간절히 무언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연주를 끝낸 등륜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묻는다. 


   “내가 연주하던 샤콘느네요.”
   “맞아. 무언가 느껴져?”


   이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가슴팍에 손을 올려 옷깃을 꾹 잡았다. 여기가 콕콕 아파요. 눈을 빛내며 말하는 게 어린아이 같아 등륜이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대파나 내려두고 말해. 소년의 품에서 대파를 가져가며 등륜이 말했다. 
   제가 연주하는 것이 낭만이라면 등륜의 연주는 애절함이었다. 이보는 무심하게 요리를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제 연주를 듣는 그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어딘가 콕콕 지끈거리면서도 굉장히 행복했다. 제가 하는 연주와 등륜의 연주까지 한데 섞이니 무수한 불빛이 여기저기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가는 소리임에도 이보는 등륜이 말한 감정이 어떤 건지 알았다. 
   소년은 느리지만 자라고 있다. 어린 날 집을 나와 감정에 서툰 소년이 제게 눈을 빛내며 묻는다. 손을 스치는 머리칼의 감촉이 부드러워서 여전히 남아있다. 곁에서 재료를 다듬던 이보가 무심하게 물었다. 


   “등륜 선배,”
   “응?”
   “남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어떤 거에요?”


   등륜이 소리 내어 말갛게 웃었다. 그건 내가 말해줄 수 없는 감정이야. 네가 찾아야 하는 조각이지. 제가 해줄 말은 이것 뿐이었다.







   4.


   등륜의 첫 독주회가 끝난 후 무대 뒤편은 시끄러웠다.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등륜은 꽃다발을 들고 서성이는 소년을 찾을 수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는 붉은 낯으로 저를 보지도 못한다. 와줘서 고마워. 등륜이 푸스스 웃으며 소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선배는 참 빛나는 사람이에요.”


   그 말을 건네고는 우다다 달려 사라진다. 눈을 깜빡이던 등륜은 소년의 말을 되새기며 푸스스 웃었다. 오글거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쑥스러운 낯으로 말하는 것이 퍽 사랑스럽다. 
   포크로 면을 감는 이보에게 등륜이 말했다. 내 첫 독주회 끝나고 네가 해준 말 기억나? 그 말에 이보가 고개를 든다. 그 날 제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했더라. 여전히 기억은 생생해서, 이보는 익은 얼굴을 그릇에 고정시키고는 고개만 끄덕인다. 


    "빛나는 열여덟의 왕이보. 기다려도 되지?"
    "……."
   "이제는 네가 빛날 차례야."


   소년에게 아직 시간은 많았다. 꿈을 꿀 날도, 이룰 날도 많다. 소년은 느리게 그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소년은 어른의 문턱에 서 있었다. 아슬아슬하지만, 아직은 맑기만한 그런 영혼은 이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느리게, 또는 겉잡을 수 없이.







   5.


   무대를 비추는 조명에 눈이 부셨다. 어떤 악보도 없이 이보는 제 눈 앞에 놓인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저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에 각오를 다진다. 이날을 위해 달려온 시간이 스쳐간다. 

   이제 달릴 시간이다. 
 
   등륜의 손끝이 천천히 움직였다. 음악실에서 우리가 함께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야. 말은 간단해도 이 독주회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무대인지 안다. 이보는 오롯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거세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악보도, 형식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가 보낸 메일에 이 곡은 텅 비어 있었다. 네가 처음 연주했던 그 날처럼 연주해줘. 제가 듣고 싶다고 조심스레 건넨 부탁에 망설임도 없이 소년이 무작정 자유롭게 연주했던 그 곡. 물 속을 노니는 물고기처럼 소년은 여유롭게 부유한다. 이 곡이라면 소년 네가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보가 등륜의 손길을 따라 건반을 두드렸다. 여지껏 그를 받쳐주는 역이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반주자가 아닌,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써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는 선율과 웅장한 피아노의 소리가 섞여 목덜미가 쭈뼛 돋는 느낌이다. 등륜이 눈가를 접은 채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흐르는 땀에 앞머리가 눅눅해지는 것을 인지할 틈도 없다. 이보는 그의 눈빛을 따라 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찬란하면서도 반짝이는 열 여덟의 감정을.

   너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서툴 뿐이야. 타인을 좋아하는 건 네가 찾아야할 감정이야. 그가 왜 제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눈과 손끝을 따라 심장이 세게 고동친다. 건반에 모든 감정을 실어 이보는 외치고 있다. 연주를 하는 순간만큼은 소년은 찬란하다. 등륜은 몸을 조금 돌려 소년을 보았다. 찾았다. 내가 그리 보고 싶던 열여덟의 너. 마주하는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우리는 음악이라는 바다 속에 부유하는 물고기다.
   연주가 끝난 후 우레와 같은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이름도 모를 곡은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등륜은 이보의 손을 잡아 무대 앞으로 이끌었다. 이보가 인사를 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저를 바라보는 부모님과 마주했다. 어린 날 제게 화를 내던 아버지가 박수를 치며 소년에게 손을 흔든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6.


   담장 가득 능소화가 폈다. 이제는 선명해진 소리로 이보가 이령을 바라본다. 한껏 짜증을 냈던 이령은, 소년이 수술을 받은 것을 알고는 누그러진 낯으로 악보를 넘겼다. 여기선 조금 약하게 치는 게 좋아. 이령의 말에 이보가 볼펜으로 그것을 적었다. 
   오늘도 연습을 빼려는 것을 진즉 눈치채어 겨우 잡아온 차였다. 이령은 숨을 고르며, 소년의 곁에 앉아 가볍게 건반을 두들겼다. 이보는 그녀가 화난 것을 알고는 푸스스 웃으며 말한다. 


   “이번 곡은 제가 정할래요.”
   “마음대로 해.”


   힘이 빠진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는 이보를 바라보며 다시는 레슨을 뺄 생각 말라고 잔소리를 한다. 알겠어요. 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낡은 3층 음악실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 무더움을 머금은 여름 냄새가 스며든다. 창틀에 기대어 푸르게 흘러가는 우주를 본다. 세상 모든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왜 이것을 듣지 않으려 외면했을까. 왜 피아노를 놓으려고 했을까. 그와 함께 연주를 한 후 모든 이유를 찾았다. 소년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매미 소리에 귀가 따가운 기분이다. 맴, 맴. 우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커튼을 스치는 바람에 여름 냄새가 한가득이다. 똑똑 노크 소리에 소년이 눈을 뜬다. 


   “공기가 많이 변했네.”


   연주회 이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다. 등륜이 문에 기대어 환하게 웃는다. 선배. 이보가 눈을 빛내며 그를 본다. 


   “여기 있을 것 같았어.”


   등륜이 천천히 이보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당신을 향한 나의 감정도,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유도. 
   바람이 풀을 스치우는 소리가 울린다. 골목 어귀에 핀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세상의 소리는 언제나 활기차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의 고요한 학교. 복도를 울리는 매미 소리. 시선의 끝에는 등륜이 있었다. 여전히 환하게 웃는 채로.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눈을 마주한 채 이보가 등륜에게 물었다. 


   "선배의 눈에는, 빛나는 열여덟의 왕이보가 있나요?"
   “응,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되뇌어봤다. 전에 등륜에게 물었던 좋아한다는 감정의 형태.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고도 복잡하게 느껴지던 공기. 왜인지 알 것 같았다. 무뎌졌던 감정이 고개를 든다. 돌고 돌아도 결국 내 모든 이유는 당신이다. 이보는 천천히 등륜에게 입을 맞췄다.
   봄이 끝났다.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소년은 멈춰섰다. 이제는 느리게 걷던 걸음을 잠시 늦추고, 달려야 한다.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의 끝에서, 소년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올해 여름은 아마도 굉장히 더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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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code: [074d0] - 2020/11/12 22:04
미친 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와줘서 존나고마워퓨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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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309e7] - 2020/11/12 22:36
진짜 다시봐도 명작......어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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