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거탕웨이 사死의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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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0 08:45
조회수: 357

사死의 찬미
(색계, 위장자에서 착안)



흔들리는 다리의 아래로 상하이의 시커먼 밤 물결이 휘몰아친다. 나는 난간을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바람에 휘몰아치는 얇은 겉옷을 여몄다.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어지러웠다. 

다리의 끝에 다다르자 차디찬 바닷바람이 몽롱한 나의 귓전을 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찬 기운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고, 심연처럼 나를 집어삼키는 커다란 여객선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배의 복도에 들어서자 빛이 눈으로 쏟아졌다. 입구에 서있던 작은 체구의 일꾼이 흘끔 나를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손에 쥔 것은 작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한밤의 여객선은 만선이라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모두 이미 탑승하여 객실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듯 했다. 15호. 좁은 문 앞에 도착하자 나는 조금 전 건네어 받은 열쇠로 객실 문을 열었다. 불은 환히 켜져 있었다. 적갈색의 목조로 꾸며진 방은 숨이 막힐 정도로 좁았지만 깔끔하였다. 나는 모자를 벗어들고는, 미약하게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배의 진동은 머리가 어찔할 정도였다. 그러나 바다 위로 멀리 떠나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내려앉듯 천천히 침대 끝에 걸터 앉은 나는 이윽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문조차 없는 방은 갑갑하여 숨이 찼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곳에 가만히 앉아 그 머나먼 곳의 정박지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그 순간 뱃고동이 울렸다. 배의 진동이 일순간 거세어졌다. 나는 양손으로 침대의 틀을 짚고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찰나의 순간 잠이 들었던 것일까? 마치 꿈을 꾼듯 하였다. 

나는 천천히 깨어나듯 눈을 떴다. 배는 이미 어두운 상하이의 앞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상하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상하이...

담배 연기와도 같은 한숨이 천천히 나의 콧속을 드나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습관적으로 코트의 단추에 손을 갖다대었던 나는, 이윽고 무엇에 홀린듯 손을 내렸다. 
나는 곁에 놓인 작은 가방을 집어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객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흔들. 흔들. 좌우로 몸이 움직인다. 마치 술에 취한듯 하다. 단정하게 불이 밝혀진 복도 위로 차디찬 구둣소리가 홀로 울려퍼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쩌면 배가 출발하자마자 복도를 헤매이는 것은 좋은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그만큼이나 그 어떤 생각이 간절하였으므로, 나는 유랑하듯 쓸쓸히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좁은 목재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난간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나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아하였다.
분명 모두가 잠들어 있다고 여겼는데, 이곳에는 아직 어두우나마 은은한 불이 밝혀져 있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저마다 둘셋씩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인가를 마시고 있었다. 불현듯 다른 세상에 온듯 하였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니 서양식 목재로 꾸며진 이곳은 어제 오후 내가 앉아서 시간을 보낸 상하이의 카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내 곁으로 다가온 서양인 웨이터가 나에게 자리를 택하라는 손짓을 했다. 잠시 넋이 빠져있던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가장 밤바다가 잘보이는 구석 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초에 불을 켜고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나는 곧장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였다. 

술은 머지 않아 도착하였다. 
망설임 없이 첫 모금을 들이킨 나는 순식간에 불길처럼 전신을 감싸는 열기에 몸을 떨었다. 

이윽고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이 나른히 몸을 감돌며 기분이 편안해졌다. 후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차디찬 물방울이 뱃전을 때리는 소리였다. 이것은 파돗소리인가, 아니면 빗소리인가. 

문득 그 소리가 떠올랐다. 홍콩의 어느 밤. 도취에 겨워 들이켰던 술. 그 술에 한없이 들떠 맨 얼굴로 한없이 부딪혀왔던 빗방울들. 그 순간 2층 높이로 솟은 전차는 천천히 모퉁이를 돌고, 내 얼굴가로 부딪혀오던 찬 물줄기들은 함께 방향을 바꾸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그 홍콩의 2층 전차를 타던 여인이, 지금 이 머나먼 곳에서... 유럽을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맡기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두른 채, 한 손에는 위스키를,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사死의 밤바다를 유랑하게 될 것을. 
나는 그저 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곁에 다가온 낯이 익은 웨이터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술기운이 오를 대로 올랐으므로, 붉고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어 더 주문하고 싶은 것이 없음을 알렸다. 친절한 웨이터는 내게, 더이상의 주문은 불가능할 지라도 계속 이곳에 앉아있을 수는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윽고 바의 진열창이 굳게 잠겼다. 테이블 쪽의 전등이 하나 둘 꺼졌다. 아직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의 촛불들과, 입구에 켜진 붉은 등 하나만이 홀로 남아 어두운 카페 안에 빛을 드리워주고 있었다.

웨이터와 바텐더들은 순식간에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주변의 손님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모두 갈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나는 그저... 
아직 떠나고 싶지가 않은데...

그러나 텅 빈 카페 안에서 원형 테이블을 앞에 두고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자, 나는 가방을 집어들고 느릿느릿 일어섰다. 

나는 인생의 어떤 목적지도 없는 사람처럼 바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텐더조차 없는 바의 앞 1인석에 한껏 미련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이 떠나며 촛불마저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사위는 점점 어두워졌다. 붉은 등만이 홀로 남아 있었으나 망망대해의 심연으로 퍼져나가는 빛을 가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상이 나를 잠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이만 가서 자라고... 어서 일어나라고... 이제 그만 떠나라고... 

나는 바에 팔을 괸 채 생각 없이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것은 거의 동이 난 위스키 잔과, 거의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갑 뿐이었다. 담배라도 더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담배를 사둘걸. 슬프구나. 취기에 찬 나는 그저 웃었다.

혹시 담배 갯수를 잘못 센 것은 아닐까. 잠시 희망에 차 담배갑 안을 뒤지던 나는 이내 실제로 담배가 두 개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맥이 빠졌다. 

그러나 문득,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두 개비나 남아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중 한 개비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문득 까르르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편해졌다. 

담배 연기처럼 들이쉬고 내쉬는 한숨. 나는 향락에 겨운 미소로 눈을 감으며 그 담배를 입에 물고, 끄트머리에 불을 붙혔다. 그러나 그 순간 어쩐지, 나는 울고 싶다고 느꼈다. 

딸깍. 

몽롱한 정신 속에서, 나는 깨어나듯 눈을 떴다. 왼켠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두 눈이 붉은 등 아래 비스듬히 드리운 그림자를 향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환영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어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바의 끄트머리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밤 물결에 흔들리며.

그는 맵시 있는 갈색 모직 코트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두운 바 앞에 걸터 앉아 담담한 얼굴로 먼 곳을 보며 숨을 쉬는 그는 세상의 향락을 온 몸으로 다 짊어진듯 하였다. 

그는 멀리서 보기에는 술에 취한듯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의 단정한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명징한 제정신인듯도 하였다. 남자의 창백한 손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양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수척하였으나 수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한 눈꺼풀을 깊게 파고 가로지른 흉터 자국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시선이 그 상흔을 바라볼 무렵, 그가 문득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시야의 옆으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다소 놀라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그것은 유령 같은 남자의 손이 내민 빛나는 은제 담배갑이었다. 나의 두 눈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그의 여윈 얼굴에는 피폐한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텅 빈 남자는 문득 맑게 빛나는 눈으로 작게 미소지었다. 기이했다. 남자는 그야말로 세상을 잃은듯 고독하고 지쳐보였다. 누군가 손이라도 댄다면 당장 외투만 남기고 풀썩 꺼져 혼령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의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앳된 미소는 언뜻 그저 한껏 응석받이로 잘 자란 부잣집 도련님 같기도 하였다. 나는 왼손을 뻗어 그의 담배갑 안에서 담배를 한 개비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내가 담배를 집어들자 그는 엷게 웃으며 담배갑을 거두어갔다. 이윽고 내가 원래 피우던 담배가 꽁초가 되어 타들어가고, 나는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가 준 담배에 불을 붙혔다. 

그가 준 담배를 입 안에 문 나는 잠시 뻐끔거리며 한껏 그 연기를 빨아들였다. 알싸한 맛이 폐부로 깊숙히 스며들었다. 아주 맛이 있었다. 나는 잠시 찬미하듯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찰나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아까처럼 앞을 보고 있었는데, 여전히 기분이 좋은지 미세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흔들, 흔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너머로, 나는 문득 술에 취한듯 가만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러자 남자의 고개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의 숙명처럼 지친 두 눈은 담담한 의문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술 기운 속을 헤매듯 물었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봐요."

사내는 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놀랐다. 진정으로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어린 아이 같아서 그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했다. 

이윽고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에 웃음기가 천천히 가시는 그는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담담히 읊조렸다. 그의 음성은 맑았다. 

"아주 오랜만에 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오래 짐을 지고 걷던 사람은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법이지요."

그 말을 하는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피폐하고 고단해보였다. 그토록 그를 힘들게 하던 짐을 이제서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저 사내는 그토록 여위고 아픈 것일까. 어쩌면 그 짐이라는 것은, 그토록 처절하고, 고통에 울부짖다 못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져야지만 마침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짐처럼. 

말을 마친 그는 담담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보았다. 우리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사내는 내게 나지막히 물었다. 

"상하이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내 눈빛에서 그는 이미 나의 답을 들었을 것이다. 하여 나는 담담히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은요?"

그는 회색으로 젖은 눈을 하고는, 가만히 웃었다. 

"상하이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나는 그의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무엇인가에 홀린듯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상하이를 떠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처절할 정도의 공허와 아픔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찰나의 순간 미처 숨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동시에 진정으로 평화롭고 행복해보이기도 했다. 그는 웃는듯 흐느끼는듯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공허한 두 눈으로 먼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 세상이 아무리 커도... 우리 같은 사람이 머무를 곳은 이 망망대해 위 뿐이니까요."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문득 전율을 떨치고 바라본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하였다. 

사내의 눈이 순간 물기로 반짝였다. 그는 새하얀 얼굴로 담담히 웃었다. 

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도...?"

사내는 처절하게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친 목소리로 옅게 웃었다. 

"그래요. 
그리고 실패하였습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앞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였음을 몰라야겠지요. 나 또한 잊혀진 사람입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흔들. 흔들. 어지러웠다. 나는 눈을 떴다. 
안타까움으로 가슴 속이 차올랐다. 

"하지만... 당신은..."

나는 어느 쪽에도 닿을 수 없는, 오직 이 망망대해를 헤맬 수 밖에 없는 이 시대의 혼령. 
그러나, 당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순간이 끝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을 살아남아, 이 망망대해를 건너, 저 머나먼 해안에 닿아, 만인이 어느 때보다도 또렷이 기억하는 이 시대를 뛰어넘어... 다음 시대에 존재할 것이다. 
이 1942년의 혼령이 아닌 다음 시대를 살아갈 인간으로서. 

사내는 담담히 웃고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먼 곳을 보았다. 

"당신은 나를 살릴 궁리를 하고 있겠지요."

나는 그의 옆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는 창백한 입술로 조소하며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그러나 그럴 방도는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돌이켰어야 했어요.
나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하여 이 시대에 내가 숨을 쉴 곳은 오직 이곳 뿐이니, 이 망망대해를 벗어나서는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젖어든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육신은 진정으로 지쳐보였다. 

"나는 이 일에 가족과 모든 이들을 잃었으며... 어제의 일로 내 진짜 신분을 알던 마지막 이마저 잃었습니다. 
이제 내 조국은 나를 모릅니다. 이제 세상은... 내가 잠입을 위해 취하였던 반역자의 신분으로 나를 기억할 겁니다. 아무도 나를 증명해주지 않아요."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나와는 달리 그는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이 시대 속에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이렇게 혼령처럼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다니. 
나는 붉은 그림자 속의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조국의 조직들은 끝까지 나를 쫓아올 겁니다. 설령 그들이 나를 살려둔다 해도 변절자의 이름 아래 어찌 살아가겠습니까? 
모든 변절자들은 붙잡히면 같은 변명을 합니다. 자신들은 변절자가 아니라고, 조국을 위해 위장 잠입 중이었을 뿐이라고... 그러나 누가 믿을까요. 
그래보았자 추악함만 더해질 뿐입니다."

그 순간 파도가 거세게 몰아쳤다. 그와 나는 높은 의자 위에 앉은 채로 속수무책으로 좌우로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체념하듯 웃었다. 남자는 이윽고 담배 연기에 한껏 취한 눈으로 한숨을 쉬듯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내 진짜 정체를 아는 것은 괴뢰 정부 뿐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나는 동료들의 총에 몸이 꿰뚫려, 변절자로 죽어서도 낙인이 찍혀, 일본군의 복수심을 원없이 만족시켜주겠지요."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읊조렸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어차피 이 일로 가족을 잃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택한 마지막 임무였으니까요." 

자소하는 그의 눈에 심해처럼 차가운 물기가 고였다. 그는 다소 벅찬 음성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다만 후회가 되는 것은... 아끼는 이들을 구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들을 잃었을 때 그 자리에서 그들을 뒤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해냈더라면, 지금 나는 이렇게 시대의 혼령처럼 망망대해 위에 홀로 남아 애석하게 담배 연기를 들이키며 자신을 연민하고 있지 않았겠지요.
그것이 가장 후회가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자기 연민이겠지요."

나는 깨달았다. 그 역시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젖어든 눈을 한 남자는 붉어진 눈시울로 바람이 빠지듯 담담하게 웃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담배가 고팠다. 나는 눈을 감고는, 그가 내게 내밀었던 담배를 입 안에 넣고 한껏 그 연기를 폐부 깊숙히 들이켰다. 

그랬구나... 그 역시 돌이킬 수 없었구나... 

안타까워라.

그러나 이제 와 추억한들 무엇하리... 끝인데...
담배 연기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마음이 아팠다. 오늘로 끝을 맞는 것은 나 혼자이길 바랐는데. 

남자는 위스키와 담배에 한껏 취한 나를 보며 잔잔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지막히 읊었다. 

"신문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문득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그저 처음처럼 진지한 두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이윽고 내게서도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는 담담히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물기가 어린 명징한 시선으로 그의 두 눈을 보았다. 그는 그런 내 눈을 바라보며 담담히 읊조렸다.

"온 세상이 당신이 한 일을 알겠지만... 
당신에게 있었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요."

배가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흔들리며 미소지었다. 왕치아즈.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으로 불렸던 순간을. 그러나 돌이키면 무엇하리. 끝인데... 이 인생도... 이 짧다면 짧은 고단함도.

"많이 고단하였지요?"

사내는 나지막한 음성을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이윽고 꿈에서 천천히 깨어나듯 나른히 눈을 떴다. 내 눈가는 붉게 젖어들어 있었다. 그는 창백한 미소를 하고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일그러진 미소로 그를 보며 한껏 웃었다. 

"그래요."

그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는듯이. 모두 옳다는 듯이.
나는 잠시 그런 그의 흉터 어린 눈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붉은 입술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요? 우리처럼 잊혀진 사람들에게도 끝이 있음이."

그의 깊은 두 눈동자가 내 눈을 향했다. 

"이 망망대해가 오늘처럼 영원토록 계속된다면... 이 배를 뒤흔들어놓는 차디찬 파도가 영원토록 몰아친다면... 이 여정은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나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많이 그리워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비로소 놓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사死를 갈망하는 것이겠지요."

정적이 흘렀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개구장이처럼, 정말로 어린 아이처럼 함뿍 웃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내 말이 마음에 드는듯 장난스럽게 박수를 칠듯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눈물이 흘렀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는 가여운 나의 육신을 받쳐 안고 내 입 속을 파고 들었다. 나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내 눈물을 부볐다. 그는 제 눈 앞에 와닿은 내 상체를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뒷목을 감쌌다. 그것은 관능적이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그의 허리를 감싸고, 내 눈 아래에 와닿은 그의 파헤쳐진 눈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물이 고인 검은 눈을 내려다보며 내가 잠시 말을 잃었을 때, 나를 보던 그가 내 얼굴을 거세게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나의 목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그의 머리를 내 가슴 안으로 감싸안았다. 

방에 도착한 우리는 창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옷을 벗겼다. 나는 희미한 그의 육신을 품 안에 안았다. 그는 내게 많은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의 육신은 불처럼 뜨거웠다. 나는 그의 흉터가 진 눈꺼풀과 목 위에 입맞추며, 그의 여윈 어깨를 품 안에 안고 숨을 헐떡였다. 나의 몸 속에 들어온 그의 가련한 나신을 으스러질듯 부둥켜안았다.

붉은 빛 속에서 나를 향해 따스하게 내리 입맞추는 그의 두 눈은 다정하였다. 중간 중간 우리의 행위가 끝을 맞을 때면,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일러주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나고 자라 사랑하는 누나와 형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비록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명가의 응석받이 막내 도련님으로 살아온 찬란한 유년기는 그 어느것도 부족하지 않은 시절이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이 사내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래 전 그의 얼굴과 이름을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났다.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남자가 내가 아는 이라니... 나와 함께 끝을 맞을 이가 내가 아는 이라니. 나는 서글프게 웃었다. 

이유를 모르는 그는 나를 따라 덩달아 미소지었다. 

나 또한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살아왔던 시절과 어제 낮의 이야기를...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담담히 나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영혼으로 나를 안아 위로해주었다. 나는 단단한 그의 품에 안겨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그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토록 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형과 누나는 그토록 그를 혼내면서도, 결코 그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말을 하며 그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어린 아이처럼 처절하게 웃었다.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그의 몸을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시간이 없어서... 더 알고 싶은데... 아직 그에 대해 다 듣지 못했는데... 아직 서로를 다 알지 못했는데 끝이 다가와서.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소리 내어 울었고, 그는 내 여윈 등을 끌어안으며 마지막으로 나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객실을 나섰다. 사위는 아직 어두웠다. 하여 언제 내일이 올지 몰랐다. 다만 아는 것은, 오늘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갑판으로 나아갔다. 얼음장 같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며 우리의 전신으로 휘몰아쳤다. 뜨거운 그의 손을 잡은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며 옅게 웃었다. 우리는 갑판의 끝으로 걸어갔다. 검은 물결 위로 물보라가 일며 넘실거렸다. 발치에 와닿는 것은 망망대해였다. 

나는 추위에 몸을 떨었고, 그는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히고 내 입술에 다정히 대어 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그가 내민 생의 마지막 향락을 들이키며 사에 들 준비를 했다. 그는 잠시 생명줄처럼 담배 연기를 들이키는 나를 가련히 바라보다, 내가 멈추자 내 입술에서 담배를 빼어 제 입술에 물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 연기를 한껏 들이키며. 

이윽고 고개를 돌린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저 먼 바다로 뿌리쳤다. 우리의 생명줄이던 담배는 홀연한 불꽃이 되어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때였다. 문득 배가 커다랗게 방향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배는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우리는 담담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어느덧 새벽의 어스름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명처럼 창백하였다. 그의 손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알약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우리의 발치를 때리는 파도 앞에서, 우리는 급히 그 알약을 입 속에 털어넣고는, 서로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망망대해가 우리를 감싸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그의 두 눈은 한껏 서글프게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함께 웃었다. 그리고 우리가 저 심연의 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지기 전, 나는 시대의 육신처럼 여윈 그를 품에 안았다. 


줃 후거탕웨이 호가탕웨이 밍타이치아즈 밍타이왕치아즈 명대치아즈 명대왕치아즈 종주님 랑야방 색,계 사의찬미

 

후거의 생일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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