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위룡 왕초연 마녀의 오두막 下🎃🛖🍂
“사조께서 문파를 만드셨을 때는 여자 사조가 참 적었지. 하여 그것 만으로도 주목받을 일이었는데, 사조는 그에 더해 급부상한 고수인 데다 정의감이 넘쳐 4대 세가에 영합하지 않았으므로 수많은 명문파의 견제를 받았어. 그러다 급기야 계파 30년째가 되던 해에는, 4대 문파 회담에서 우리 사부가 사악한 마녀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지. 나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사부께서는 그 말을 듣고 웃어 넘기시며, 조심은 하되 그래도 몸을 사리느라 창생을 구제한다는 본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 우리 사문은 깊은 산 속에 위치한 데다, 법진 때문에 내부의 초대를 받지 않는 한 외부인은 찾아올 수 없기에 걱정할 것 없다시면서. 그리고는 마음 편히 폐관수련에 들어가셨지.
그런데 그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산 남쪽에 홍수가 들어서 많은 이재민이 생겼어. 나는 이재민 중 어떤 사람이 섞여 있을지 모르니 이번에는 문파의 안전을 위해 절대로 그들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 사저는 창생을 돕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면서도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의 뜻에 따라 주었어. 그러나 언제나 정의감이 앞섰던 사제는 달랐지. 사제는 매일 창생들을 돕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밤이 되어 돌아올 때마다, 그들을 뒤에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어.
그러다 며칠 후, 급기야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어. 사제가 밤이 되어 산으로 돌아왔는데, 글쎄 뒤에 이재민을 백 명이 넘게 달고 왔지 뭐니. 나는 사제에게 따졌지만 사제는 오히려 준엄하게 내게 맞섰고, 사저 또한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사제 편을 들었어. 두 사람은 원래 성품이 비슷했던 데다 당시에는 이미 연인 사이였으니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그저 이미 문파에 들어와 버린 이재민들을 철저히 검사하여 법력이나 법기를 지녔는지 알아보는 게 고작이었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이재민들 중에는 4대 문파에서 비밀리에 양성한 고수 30여 명이 섞여 있었어. 그들은 대사저한테도 법력을 감출 수 있는 엄청난 고수들이었지.
그리고 그 날 밤. 사문에서 잔혹한 살육이 벌어졌어. 우리는 사부의 육신을 불태운 재가 바람에 휘날리는 광경을 뒤로 하며, 사문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지.”
나는 절망에 빠져 넋을 놓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게 진상이라고? 나의 부친의 잘못으로 계알락파가 멸문하였다고? 나는 차라리 거짓이기를 바라며 수정 구슬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구슬의 색은 변치 않았다. 나는 말했다.
“그래서 사고께서 제 부모님과 연을 끊으신 거군요?”
왕초연은 나를 담담히 보며 답했다.
“그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저는 두 분의 아들인데... 제가 밉지 않으신가요? 제가 정말 사고의 곁에 머물러도 되나요?”
왕초연은 고개를 젖히고 웃더니 말했다.
“내가 네 부모가 미워서 연을 끊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저가 너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뻤어.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나는 깊은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또다시 버림받을까봐 심장이 철렁했는데 사고가 이렇게 말해주니 정말로 윗세대의 악연을 뒤로 하고 사고께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고. 제 아버지가 비록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셨지만... 그 의도는 선량하였으니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사고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부모님은 정의로운 분들이고, 한평생 창생을 위하는 정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왕초연은 나를 꿰뚫을 듯한 눈으로 응시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열어둔 창문으로 스산한 안개 바람이 불어왔다. 냄비 속의 약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반응에 당황하여 굳어 있는데, 그때 그녀가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400년이나 지나서 똑같이 생긴 아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으니 꼭 사제가 살아 돌아와서 변명하는 기분이구나. 죽여버리고 싶어.”
나는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녀가 농담이었다는 듯 깔깔 웃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어차피 이미 죽은 사제를 어쩌겠니. 죽은 사람한테 뭘 어쩐다고 내 분이 풀리겠어?”
나는 안도하여 온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십년을 감수한 나는 바로 숙연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생각보다 더 도량이 넓고 초연한 사람이었다. 내가 단지 그녀가 마녀라는 이유로, 그간 수많은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또다시 오해했을 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매혹적으로 미소지었다.
“마침내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네가 부디 오래오래 살기를 바랐단다.”
나는 홀린 듯 그녀의 다정한 눈을 마주보았다. 가슴 속이 뭉클해졌다. 오늘 내가 사고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내 부모님과 사고 사이에 있었던 일의 진상은 영영 들을 일이 없었을 테고, 설령 들었다 하더라도 나는 사고를 그저 원한을 품은 마녀로 오해하였을 것이다. 용기내어 찾아오기를 잘했다. 이로써 마침내 나는 내 존재의 근원과도 같은 진상을 알게 된 것이다.
왕초연은 그런 내 생각을 다 읽는 듯 나를 보며 작게 웃더니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화로의 불꽃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붉게 일렁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냄비 안에서 나오는 증기의 냄새를 맡더니, 다시 눈을 뜨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는 물었다.
“다리를 고치는 약인가요?”
왕초연은 국자로 약을 퍼서 또다른 상아색 잔에 담은 뒤 내게 내밀며 말했다.
“당장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일단 통증은 줄여줄 거야. 어쨌거나 먹어서 해 될 일은 없는 약이야.”
나는 투명한 수정구슬을 옆으로 밀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왕초연은 턱을 살며시 괸 채 그런 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모금 삼키고 보니 이건 즙이 아니라 약인데도 참 맛있었다. 사고가 만든 건 뭐든지 맛있는 모양이었다.
약을 음료처럼 천천히 마시던 나는 뜬금없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번쩍 들고 왕초연에게 물었다.
“참, 또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보호 주문을 걸었는데 사고께서는 혹시 그게 무슨 주문인지 아시나요?”
왕초연은 반갑다는 듯 한껏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 그거! 응, 알고 있어. 참 신기한 보호 마법이지. 어떤 위대한 마술사도 깰 수 없는 강력한 법술이야.”
“아시는군요! 지금까지 내내 그게 궁금했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보호 마법을 거셨던 건 기억 나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법술의 보호를 받은 기억이 없거든요. 그건 대체 무슨 법술입니까?”
나는 앞으로 몸을 숙이며 흥미진진하게 물었다. 왕초연은 똑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너한테는 두 개의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 첫째, 네가 신뢰하지 않는 상대나 네가 허락하지 않은 방법은 너를 해할 수 없어. 그리고 둘째... 너는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무조건 잊게 되어있어.”
둘 다 정말 예상 밖의 법술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허락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해할 수 없다고요? 그런데 제 손과 화상은... 지금껏 무수한 존재들이 저를 해하였는데, 그게 전부 제가 그들을 믿고 제 곁에 오게 해줬기에 가능했다는 건가요?”
왕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는 벙찐 채 물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는다는 건... 대체... 그런데 최악의 기억이 다 잊힌다면서 왜 그 모든 사건은 잊히지 않았죠?”
왕초연은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왠지 약간 조소처럼 보였다.
“그 고통이 크긴 해도 최악까진 아니었기 때문이겠지. 너는 네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 웬만한 고통은 다 감내하도록 배우며 자랐잖니. 네게 그 정도는 견딜 만했던 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고통과 외로움, 배신... 그것들이 다 이런 근원을 가지고 있었다니.
아, 부모님이 그렇게 비명횡사하시지 않았다면, 적어도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제대로 설명을 해줄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수호 법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 테고, 사고도 일찍 찾았을 테고, 이렇게 고통받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나 다 지난 일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사고에게 감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목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목을 움켜쥐며 기침을 했다. 나는 사고를 향해 다급히 손짓을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왕초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런 내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했다. 나는 탁자를 다급히 두드리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때 왕초연이 손짓을 해 제 찻잔의 숟가락을 염력으로 휘젓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며 웃었다.
“오늘은 좀 오래 걸렸네. 한참 기다렸잖아.”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그녀를 보았다. 뭐가 오래 걸렸단 말인가...? 설마... 독? 나는 서서히 시선을 내려서 내 앞에 놓인 검은 냄비와 약을 보았다. 사고가... 사고가...? 기어이 내 부모의 과오를 용서치 못하고 내게 복수를 했단 말인가? 나는 충격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수정구슬이...”
왕초연은 가소롭다는 듯 나를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너는 정말로 400살이나 된 대마녀가 너의 심문 하나 당하지 못할 걸로 생각했니?”
나는 얼이 빠진 채 피를 토하였다. 그리고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마법사도... 사조의 수정 구슬 앞에서는...”
“내가 오늘 말한 내용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야. 단지 진실의 전부가 아니었을 뿐이지. 지금 네가 마신 약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독은 아까 마신 호박즙에 있거든.”
왕초연은 즐거운 얼굴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먼 기억 속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 날... 화형당하는 사부를 뒤로 하고 산 아래로 도망쳤을 때, 나는 몸을 추스른 즉시 네 아비를 죽여 원한을 갚으려 했어. 그러나 사저가 앞을 막아섰지. 사저는 사제가 단지 선의에서 그랬을 뿐이라며, 내가 사제를 죽인다 해도 사부는 돌아오지 않으니 우리는 사제를 벌하는 대신 힘을 내서 남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어. 그러더니 심지어 그러더라. 사실 사부께서 최근 수련하시던 무공은 흑마술의 경계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 사부께서도 마녀라고 불릴 걸 어느 정도 감수하셨을 거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어. 사부는 그렇게 사악한 자들의 음모와 사제의 오만한 아집에 당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이미 죽은 사람이니 그냥 덮고 넘어가야 한다고? 마녀 같은 행동을 했으니 화형을 당해도 싸다고? 자기가 마음 편히 사는 게 그런 고통을 겪고 죽은 사부의 원한을 갚는 것보다 중요해? 사제가 제 연인이 아니었어도 과연 그렇게 말했을까? 그 반반한 얼굴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천하의 배은망덕한 것.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사부를 두고 사내한테 미쳐서.
분개한 나는 그 자리에서 사저와 사제를 공격했지만, 두 사람을 이길 수는 없었어. 사저는 나를 제압한 뒤 내 법력을 봉인해 나를 산 속에 버려두고 사제와 함께 떠났지. 내가 그토록 존경했던 사저가, 사부를 배신하고, 사문을 배신하고, 정의를 배신한 거야. 그때 나는 결심했어. 먼 훗날 반드시 대마녀가 되어, 마녀를 태워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응징해 주리라고. 그때가 되면 그들은 대마녀라는 단어에 경멸이 아닌 추앙을 담게 될 것이며, 내 발 밑에 엎드려 몸을 떨며 자비를 빌게 될 것이라고. 마녀는 죽임을 당할 때도 정당성이 필요치 않은 존재니 죽일 때도 정당성이 필요치 않겠지. 하여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가장 끔찍한 복수를 꿈꿀 수 있었어.”
나는 안타까움을 담아 애원하듯 호소했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사고의 용서를 받고 싶었다.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제 부모님이 사조의 복수를 했잖아요. 그 결과로 돌아가시기까지 했다고요!"
왕초연은 나를 안쓰러워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아직도 네 부모한테 양심이란 게 남아있었다고 생각하니? 네 부모는 사부의 복수를 하지 않았어. 내가 했지. 내가 두 사람을 찾아가 함께 복수하자고 청했을 때 그들은 단칼에 거절했어. 더 이상 그 날의 일은 돌아보고 싶지 않다며, 이제 가정이 생겼으니 다 잊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서. 네 부모가 복수의 주역이라는 소문은 내가 퍼뜨린 거야. 그래야 사대문파에서 너희 부모를 노릴 것 아니니?”
아, 부모님이 살해당한 이유가... 왕초연은 상상 이상으로 악독했으며 상상 이상으로 깊은 원한을 품은 존재였다. 내 눈에서 비통함의 눈물이 흘렀다. 부모님이 사고의 음모에 당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니. 왕초연은 내 얼굴을 보고 우스워 죽겠다는 듯 깔깔대며 말했다.
“네 부모는 일대종사들이었지만, 6년을 사대문파에 쫓긴 끝에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살수들과 함께 숲에서 동귀어진하고 말았어.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 네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 결국 믿을 건 미우나 고우나 사매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네 팔목에 그런 문구를 새겼지. 나를 찾으라고. 이 세상 어떤 법술로도 지워지지 않는 강력한 낙인을.”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부들부들 떨며 그녀를 보았다. 왕초연은 나를 빤히 마주보며 조소가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 부모가 죽었다기에 나는 급히 그들의 거처로 가 보았는데, 그때 때마침 네가 죽은 그것들의 시체를 붙들고 울고 있더군. 그리고 그 순간, 사저와 사제한테 자식이 있다는 게 새삼 무척 기쁘게 느껴졌어. 문득 아주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거든. 사저와 사제는 무공의 경지가 높아 죽여 치우는 것으로밖에 복수를 할 수 없었지만 너는 다르잖아? 네가 다 자랄 때쯤이면 나는 대마녀가 되어 너를 오래오래 살려놓고도 충분히 갖고 놀 수 있을 텐데. 하여 난 일단 너를 살려두기로 하였어. 그리고 지켜보기로 했지. 그 잘난 두 사람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아이는 과연 어떤 삶을 살까. 행복할까? 아니면 사부처럼 고통 받을까. 아니나 다를까 네 삶은 하루하루가 고문과도 같더구나. 특히 내가 이간질을 해서 새안파를 멸문시킨 후로는.”
나는 절망에 절규를 하고 싶었으나 목구멍이 타는 듯하여 그럴 수 없었다. 왕초연은 말했다.
“그 수정 구슬은 주인 혼백의 일부를 담아 두었다가 사후에 그의 단순한 원칙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그렇기에 당할 사람의 고통은 아랑곳 않고 입바른 소리 밖에는 하지 못해. 뭐, 그건 생전 네 어미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야. 아무튼 그 결과 구슬의 조언을 따른 너의 삶은 고문과도 같게 되었어. 너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사람을 믿고, 베풀고, 희망을 가지며 살았는데, 그럴수록 고통은 가중되고 심신은 만신창이가 된 거야. 차라리 진작 타락의 길을 걷거나 죽어버렸으면 그처럼 고통 받지 않았을 텐데. 그거 아니? 자고로 네 고통에 책임져주지 않는 존재의 조언은 듣는 게 아니란다.
왕초연은 황홀경에 젖어 꿈꾸듯 말했다.
“그리고 그 보호 마법은... 아... 과연 화룡점정이었지. 알고 있니? 사실 넌 오늘 처음 나를 찾아온 게 아니야. 이번이 벌써 네 번째지. 너는 그때마다 독을 마셨단다. 그 결과로 단지 부러졌을 뿐이었던 손목이 어느덧 썩어 문드러져 절단하게 되고, 나아가던 화상이 덧나 흉으로 남게 되었지. 하지만 너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그 모든 진상을 밝힐 때마다, 그것은 최악의 기억이 되어 네게서 잊혔거든. 그래서 너는 네 손목이 처음부터 부상이 너무 심해 절단된 것이고, 화상도 처음부터 너무 심해 흉이 졌고, 무릎도 옛날에 얻은 부상이 도진 것이라 믿게 되었어. 그리고 계속 나를 찾아왔지. 또 독을 먹으려고. 그 우스운 꼴이라니! 어미가 돼서 축복이랍시고 그런 저주를 내리다니. 그 저주만 아니었다면 너는 나쁜 기억을 마음에 새기고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을 텐데.
네 부모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고통과 두려움의 기억이란 때로는 아주 유용하단다. 그런데 네 어머니는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저 보지만 않으면 된다고, 잊기만 하면 된다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야. 하긴, 그랬으니 사부가 화형당하는 걸 눈 앞에서 보고도 이미 지나간 일이니 잊어야 된다는 소리를 했겠지. 그 결과 그 자식이 지가 당한 일을 기억도 못하고 내 손바닥에서 끝없이 놀아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재밌던지. 이게 무슨 위대한 촌극이야? 과연 네 어미가 죽기 전 최선을 다해 남긴 역작이 아니겠니. 그런 역작을 남겼으니 사매로서 응당 즐겨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어? 역시 부모의 사랑이란 참으로 위대해, 그렇지?”
태어나서 이렇게 순수한 악의 그 자체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사악함이 두려워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왕초연은 아주 기꺼운 추억을 회상하듯 미소가 만면한 채 웃음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 날, 나는 네 부모의 시신을 이곳으로 가지고 와서 제단에 바친 후, 춤을 췄어. 어두침침한 가을 절벽 위, 대마녀의 춤을.”
눈 앞에 그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제단 한가운데, 한 팔을 높이 치켜든 대마녀가 비석처럼 둘러선 돌 앞을 스쳐 지나가며 몸을 돌리고, 환락 속에서 악의의 승리를 한껏 자축하는 모습이. 실수로 엿보았던 이들이 모두 공포감에 절명하고야 말았다던 그 사악한 흑마녀의 춤이.
나는 공포에 온 몸이 압도된 채 눈물이 고인 눈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두 분의 유해를 어떻게 한 거예요? 지금 그 유골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초연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내 쪽을 건너보며 말했다.
“거기 있잖아.”
나는 왕초연이 눈짓한 곳을 따라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전신이 얼어붙었다. 그곳에는 내가 방금 전 호박즙을 들이켜고 남은 상아색 잔이 있었다.
“그건 네 어미의 두개골로 만든 거고 나머지 유해는 네가 오늘 제단에 들어오면서 밟은 풀 아래에 묻혀 있단다. 너는 이곳에 올 때마다 네 부모의 유골을 밟고 네 어미의 뼈다귀에 독을 마셨어. 천상의 맛이라면서. 게걸스럽게.”
아... 아... 눈앞이 흐려졌다. 전신이 화마와 같은 열기에 휩싸였다. 뇌의 어느 한 곳이 끊어지듯 투둑 소리를 내며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왕초연은 앞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빛나는 눈동자로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미의 뼈다귀를 핥는 맛이 좋았니?”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것은 단연 내 생애 최고의 고통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늦가을의 산은 스산했다. 안개와 먹구름이 짙게 내리깔린 숲 속은 어두침침하였고, 빛 바랜 낙엽은 수북이 쌓인 채 습하고 묵직한 바람에 이따금씩 몸을 떨고 있었다. 저벅저벅. 나는 발이 푹푹 빠지는 낙엽 위를 밟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예전이라면 쉬이 올라갔을 산길이지만 몇 년 전 두 눈을 잃은 후로는 앞을 볼 수 없어 지팡이를 짚어야 했으므로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나는 마녀의 오두막을 찾고 있다. 그 마녀는 나의 사고(師姑)로, 어머니의 사매이자 아버지의 사저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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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대책없는 과한 낙관주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주는 명작! 그럼에도 그런일을 당하는 송위룡의 미모가... 넘 안타까워